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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WT Jul 26. 2022

너에겐 텃밭 서리, 나에겐 몸서리

텃밭 농작물 서리꾼에게 당하다

서리: 떼를 지어 남의 과일, 곡식, 가축 따위를 훔쳐 먹는 장난


'서리'라는 단어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유의어에 '도둑질'이 나옵니다. 제가 직접 겪어 보지 않은 일이라면, '그깟 농작물 몇 개 가져가는 게 도둑질이라는 건 과하지 않나?'라는 얕은 사고에 머물렀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직접 서리를 당해보니, 이거 도둑질 맞습니다. 딱 도둑질당했을 때의 그 기분이 들고, 그만큼 속상하거든요. 서리를 한 사람에게는 단순한 농작물 몇 개 훔쳐 가는 행위이겠지만, 제게는 몸서리쳐질 만큼 속상한 사건으로 남을 것 같습니다.



피, 땀, 눈물


엊그제 시작한 장마는 벌써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장마의 끝인 장마의 마지막 날, 일요일에 평소처럼 농작물을 수확하러, 텃밭으로 향했습니다. 어느덧 텃밭 나들이는 제 주말 루틴 중 하나가 되어버릴 만큼, 제 삶의 일부가 되었지요. 텃밭에 많은 시간을 할애할수록, 텃밭의 농작물들에 대한 제 관심과 사랑도 커지고 있고요. 농작물 수확이라는 일차원적인 기쁨을 넘어서, 농작물의 생장 과정을 지켜보고, 그들을 관심과 사랑으로 돌봐주는 과정 하나하나가 요즘 제게는 삶의 큰 활력소입니다.  


장마 속 장대 같은 빗물로 가득 찬 아마존 텃밭


장마로 어제도 비가 내렸기에, 오늘도 텃밭은 아마존 가면을 쓰고 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높게 자란 울창한 농작물 사이 뿌연 물웅덩이를 장화 신고 겨우겨우 걸어 다녔습니다. 장마철 아마존 텃밭은 상당히 험난한 여정입니다. 장마가 시작된 이후로 텃밭 작물은 엄청난 속도로 커갔고, 텃밭에서 수확 외에 다른 작업은 많이 못 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올여름이 끝나고 참외와 고구마를 수확할 때쯤이면 텃밭 대부분을 정리할 수 있게 될 거란 희망을 가지고, 일단 지켜보고 있는 중이죠. 그래도 수확은 절대 빼놓을 수 없기에 텃밭을 돌면서 오늘은 무엇을 수확할지 관찰해 보았습니다.


수확할 거리를 찾아보기 위해 텃밭을 둘러보던 중, 한 가지 의심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그동안 흘린 피, 땀, 눈물이 곳곳에 묻어나는 우리 농작물들을, 저 말고도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는 검은 그림자가 있는 것 같더군요. 제가 찾은 단서는 이렇습니다.


1. 옥수수 몇 개가 사라졌다. 옥수수를 뜯어낼 때 아주 험하게 뜯어낸 흔적이 눈에 띈다.

아프게 옥수수가 뜯겨 나간 흔적들


2. 이번 주에 따가기 위해서 아껴둔 애호박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잘 크던 애호박이 있었는데 없습니다


3. 상추 일부의 윗부분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처음에 옥수수가 뜯긴 흔적을 봤을 때는 혹시 지난번에 내가 이렇게 험하게 뜯었나 생각하며 가볍게 넘겼습니다. 몇 발자국 안 가서, 이번 주 수확을 목표로 남겨둔 애호박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걸 보자 뭔가 수상한 낌새를 느꼈죠. 마지막으로 윗부분이 아예 잘려 나간 상추를 발견하자, 이건 누군가가 제 농작물을 가져간 게 확실하다고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습니다. 몰래 훔쳐 가며 얼마나 마음이 급했으면 상추 잎만 뜯어가지 않고, 통째로 뜯어갔을까 싶더라고요. 윗부분이 통째로 뜯겨나간 이 상추는 앞으로 아무런 결실을 맺지 못합니다.



서리꾼 던진 작은 돌이 초래한 결과


서리를 당했다는 생각이 들 때쯤, 텃밭을 빌려 쓸 수 있도록 도와준 제 친구와의 카톡이 생각났습니다. 그 동네에서 아줌마 한 분이 농작물을 따간다는 내용의 카톡이었습니다. 올 것이 왔구나 싶으면서도, 훔칠 게 없어서 이 코딱지만 한 텃밭 농사 작물을 훔쳐 가나 싶었고, 원망의 아우성이 마음속에서 멈추질 않았습니다. 문제는 그때부터였습니다.


전문(?) 서리꾼이 인근에 있다는 생각을 시작하자, 지금 텃밭에서 힘들게 키운 농작물을 앞으로도 계속 빼앗길지 모른다는 걱정이 먹구름처럼 제 마음을 삼켰습니다. 그래서 당장 수확할 만한 농작물을 모조리 수확하기 시작했죠. 더 내버려 두면, 더 알이 실하게 찰만한 옥수수도 갈등 끝에 일부 수확해버렸습니다. 그나마 이 옥수수마저 빼앗길지 모른다는 걱정이 앞서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상당히 많은 상추, 고추, 토마토, 옥수수와 단호박 한 개를 수확했죠.


걱정과 욕심에 생각보다 많이 수확해버린 오늘의 수확


한없이 평화롭던 텃밭에서의 제 힐링 시간은 걱정과 빼앗기지 않으려는 욕심으로 뒤범벅이 되어버려, 더 이상 기쁘지만은 않았습니다. 이 서리꾼이 가져간 농작물 사이에 제 마음속 평화로움도 함께 끼어들어가 있었나 봅니다. 더는 빼앗기지 않겠다고 발버둥 친 제 모습도 눈앞에 아른거리는 지금. 텃밭 글을 쓰는 오늘 밤은 좀 슬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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