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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WT Aug 08. 2022

상추 꽃이 피었습니다. 이제 안녕.

올여름 상추, 그 마지막 수확

고마운 상추


저는 원래 상추를 자주 챙겨 먹을 정도로 상추를 좋아하던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삼겹살을 구워 먹을 계획으로 장을 볼 때가 아니라면, 상추를 사는 날이 손에 꼽았죠. 하지만 상추 모종을 심고 나서, 제 밥상에서 상추의 역할은 김치와 겨뤄봐도 될 만큼 비중이 커졌습니다. 냉장고 속 쌈장과 함께 환상의 콤비가 되어, 고기가 아닌 어떠한 반찬을 넣어 쌈을 싸 먹어도 맛있는 밥도둑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습니다.  채소가 생각날 때면 샐러드처럼, 자연스레 상추와 쌈장을 꺼내고 있는 제 모습이 참 많이도 변했네요.


이렇게 상추를 자주 먹게 된 공은 바로 텃밭 농사에 있습니다. 텃밭 농사를 시작하면서 적상추 모종 6개와 청상추 모종 6개를 심었었죠. 그 이후로는 상추가 남아 이웃집과 나눠야 할 만큼 풍족한 상추 삶을 보내고 있습니다. 올해 첫 농사를 지으면서, 가장 잘 심었다고 생각되는 농작물 중 하나는 단연 상추이고요. 글을 쓰다 보니 상추가 뭐라고, 칭찬만 줄줄이 늘어놓고 있네요. 그 정도로 고작 상추 모종 몇 개는 제 인생에 큰 만족을 주고 있습니다.


5월에 심은 상추 모종과 8월 초 꽃을 피운 상추



상추 꽃이 피었습니다


농사를 지으며 몰랐거나 무심코 흘려버렸던 자연의 섭리에 종종 놀라는데요. 상추 잎만 먹으며 살아온 저로서는 상추도 꽃이 핀다는 사실을 최근에야 알았습니다. 상추는 뜨거운 여름이 되면 꽃이 피고, 상추 잎은 질겨지고 맛도 써서 더 이상 먹을 수 없게 됩니다. 식물로서 생장하다가 꽃이 피고, 씨를 맺고, 삶을 마감하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한데, 내가 알던 그 상추에 꽃이 핀다는 사실은 왜 이리도 어색하기만 한 걸까요? 눈으로 보기 전까지는 인정하기 어려웠습니다.


언젠가는 우리 집 상추도 꽃이 피겠지라는 궁금증이 사실로 바뀌었습니다. 텃밭에서 만난 상추는 노랗고 아기자기한 꽃들을 피우며, 단순한 잎채소가 아닌 꽃을 피우는 식물체의 자태를 뽐내고 있었습니다. 언젠가는 만날 상추 꽃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막상 상추 꽃을 만나니 복잡한 생각이 머릿속에서 뒤엉키기 시작했습니다.


"상추 꽃이 이렇게 생겼구나. 생각보다 꽤 예쁜데?"

"이렇게 갑자기 꽃이 피다니... 너무 갑작스러워서 당혹스럽네."

"상추 잎을 당분간 못 따먹는 거네? 요즘 비싸다던데."

"아... 이렇게 상추는 이제 안녕인 건가? 마음 한편이 시리네..."




상추, 이제 안녕. 그동안 고마웠어.


저는 개인적으로 이별에 매우 감정적인 사람입니다. 친정 부모님은 물론, 누군가가 저희 집을 방문해서 며칠을 함께 있다가 돌아가는 날이면, 마음 한구석이 휑하다 못해 슬퍼지는 그런 사람입니다. 몇 날 며칠을 함께 있다가 헤어졌을 때도 슬퍼하는 사람인 제게, 누군가와의 이별은 생각하고 싶지 않을 만큼 큰 아픔입니다. 얼마 전 친구의 부친상으로 장례식을 갔을 때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으며 저를 우직하게 맞아주던 친구를 앞에 두고 제가 염치없이 울었었죠. 아버지를 보냈을 친구의 마음을 생각하니 가슴속이 먹먹해져서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한테만 이런 마음이 드는 줄 알았는데, 아니네요. 식물에게도 똑같은 마음이 듭니다. 몇 개월 동안 함께 시간을 보냈던 상추가 이렇게 갑작스럽게 이별의 순간이 찾아왔다고 생각하니 가슴속이 찡해지더군요. 이 상추라는 녀석, 제가 해주는 것이라곤 가끔 물을 준 것뿐인데, 저와 제 가족 그리고 제 지인들에게 아낌없이 상추 잎을 내주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받은 거에 비해 제가 해준 게 초라하네요.


이렇게 8월 5일은 제 첫 상추 농사의 마지막 마침표를 찍는 날이 되었습니다. 마지막까지 풍족한 상추를 내어준 상추, 참 고마웠습니다. 올해 상추 농사는 제 기억에 풍족하고, 따뜻한 추억으로 남을 것 같네요.


마지막으로 수확한 상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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