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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WT Oct 25. 2022

늙어서 더 아름답다

늙은 호박으로 만드는 호박죽

기다림의 시간


의도적으로 늙은 호박을 키우지는 앉았습니다. 그저 구석 외진 곳에 꼭꼭 숨어, '나 찾아봐라' 부르짖던 호박을 제가 찾지 못했을 뿐이죠. 제가 찾아주기만을 기다리던 호박은, 서운함이 폭발했는지 샛노랗게 변해가고 있었습니다. 비록 수확 시기를 놓치고, 커지다 못해 늙어버린 호박이지만 늙은 호박을 보니 갑자기 욕심이 생기더군요. 


'이참에 늙은 호박으로 뭘 만들어볼까?'


이렇게 호기심 반, 욕심 반으로 시작해서 첫 김장도 성공했으니, 늙은 호박 요리도 마다할 일이 없었습니다. 친정엄마에게 여쭤보니 단번에 호박죽을 만들어 먹으라 하시더군요. 왜 그 생각을 미처 못했을까 싶은 순간이었습니다. 늙은 호박으로 만든 호박죽이라면, 아이들 간식으로도 충분히 유용하겠다 싶었습니다. 


그 뒤로 늙은 호박을 수확할 타이밍을 계속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무 때나 수확하지 말고, 첫서리를 맞고 나서 수확해야 맛이 좋다는 엄마의 고견을 따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날씨도 추워지고, 늙은 호박에 젊은 청춘 호박의 빛깔인 초록 색이 모두 사라질 때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렸습니다. 노랗게 변하기 시작할 무렵부터 몇 달 후, 드디어 늙은 호박을 수확했죠. 지긋지긋한 달팽이는 늙은 호박에서도 만나네요.


기다림 끝에 수확한 늙은 호박



늙어서 더 아름답다


제가 이번에 수확한 늙은 호박은 무게도 굉장히 무겁고, 크기도 굉장히 큰 엄청난 수확이었습니다. 다가오는 핼러윈에 호박 조각을 해도 재미있겠다 싶은 멋진 비주얼을 자랑했지요. 미국 유학시절 봤던 호박 조각을 한국에서 해보고 싶은 마음도 잠시 들었지만, 욕심을 내려놓고 비교적 간단한 호박죽 만들기에 집중하기로 했습니다. 


늙은 호박으로 호박죽 만들기를 검색해 보니, 생각 외로 호박죽 만들기는 간단했습니다. 죽이라는 이미지 때문에 몇 시간을 땀 흘리며 끓어야 하나 싶었지만 생각보다 간단했죠. 


1. 호박씨와 속을 제거하고, 잘 삶아지도록 호박을 작은 조각으로 자른다.


2. 호박 껍질을 벗겨낸다.


3. 호박에 물을 넣고 푹 삶아준다. 

4. 호박 삶은 물 조금에 찹쌀가루를 넣고 익반죽을 하여, 새알을 만든다. 


5. 호박이 잘 삶아지면, 새알을 넣고 새알이 익을 때까지 끓인다. 물 위로 새알이 동동 뜨면 다 익은 것!

6. 새알이 잘 익으면, 찹쌀가루를 푼 물을 넣어 죽의 농도를 맞춰준다. 

7. 기호에 맞게 설탕과 소금을 넣고 간을 맞춰준다. 


완성된 호박죽은 제 입맛에 너무나 딱 맞는 호박죽이었습니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제가 지극히 제 입맛에 맞는 호박죽을 만들어 놨더군요. 아직은 아이의 입맛이 제게도 남은 걸까요. 저는 아직도 팥이 없는 호박죽을 선호합니다. 기왕이면 달고 새알도 많은 그런 호박죽을 좋아하죠. 딱 그런 호박죽이 나왔습니다. 너무 커서 다 사용하지 못한 호박 반 통은, 잘게 조각을 내서 냉동실로 고이 옮겼습니다. 추운 올겨울 다시 한번 호박죽으로 겨울을 따뜻하게 보내고 싶어서요.



계획대로 되지 않아도 괜찮아요


솔직히 고백하자면, 제가 직접 텃밭을 가꾸며 길러낸 늙은 호박이 아니라면 저는 호박죽을 어쩌면 평생 동안 만들어 볼 일이 없었을 것 같습니다. 마트에서는 늙은 호박을 본적조차 거의 없고, 시장에서 가끔 마주치던 늙은 호박은 제 관심 밖의 식재료라서 제가 눈길 한번 제대로 주지 않았기 때문이죠. 게다가 시판 호박죽 구하기도 너무나 쉬운 세상에 저는 살고 있습니다. 


굳이 사기 힘든 늙은 호박을 사서, 혼자 다 먹지 못할 양의 호박죽을 힘들게 만들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머리로 계산해 보면 전혀 득이 되지 않는 작업이죠. 하지만 모든 게 머릿속 계산대로 되지 않는 게 인생 아니겠어요? 되돌아보면 아이를 가지고 낳기 전까지는, 나름 인생이 머릿속 계산과 계획대로 잘 흘러갔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이라는 존재가 제 인생의 일부분으로 자리 잡으면서, 삶은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게 훨씬 많다는 걸 깨달았죠. 수중 가족 분만을 계획하던 중, 저희 첫째는 2주나 먼저 양수를 박차고 나와버렸습니다. 그 순간부터 '제 삶'임에도 불구하고 제 인생은 제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수도 없이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굳이 만들어 먹을 필요 없는 호박죽을 만들기를 참 잘한 것 같습니다. 호박을 키우는 텃밭에서, 저는 자연이 주는 힐링과 함께 적지 않은 마음의 치유를 얻었지요. 그리고 호박죽을 처음으로 만들면서, 해보지 못했던 요리를 성공한 성취감도 일궜고요. 게다가 넉넉한 호박죽의 양 덕분에, 아끼는 이웃과 호박죽도 나눠 먹으며 한 뼘 더 가까워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머리로 계산했을 때와는 역시 다른 뜻밖의 결과가 나왔습니다. 늙은 호박 하나 덕분에 오늘도 교훈 하나 얻어 갑니다. 앞으로도 머리로 계산하기보다는, 종종 마음이 시키는 대로 살아가도 될 것 같습니다.


교훈을 남겨준 늙은 호박과 호박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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