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GWT Oct 02. 2022

오징어 게임 말고, 무 게임

무 솎아주기

새 식구가 된 무


여름의 끝자락, 가을의 초입에 하얀 무를 텃밭에 심었었습니다. 배추와 함께 가을에 김치를 담글 때 사용하려고 무를 심었지요. 일찌감치 심은 하얀 무는 뭇국도 끓여 먹을 수 있고, 동치미도 담가 먹을 수 있는 시중에서 사기 쉬운 큰 무입니다. 가을 김장철 깍두기의 재료로도 쓰일 수 있기에 이맘때 꼭 키워야 하는 식자재 중에 하나이지요.


무 씨앗 한 봉지를 사서 텃밭에 구멍을 조금씩 내서 2-3개씩 골고루 뿌려주었습니다. 이렇게 심은 무에서 새싹이 나오고 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솎아주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솎아준다는 표현은 어색하실지 모르겠어요. 자세히 풀어보자면, 구멍 하나에 여러 개의 싹이 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 개 이상의 씨앗을 넣어주었으니까요. 간혹 발아하지 못하는 씨앗들이 있기 때문에 씨를 넉넉하게 뿌립니다. 여러 개의 싹이 나면 그중에 튼실한 동물의 왕 사자 같은 놈을 하나 살려두고, 나머지는 모두 없애버리는 겁니다. 이게 바로 초보 농사꾼인 제가 이해한 솎아주는 과정입니다.


한 개의 구멍에 여러 개의 무가 자라고 있는 모습



오징어 게임 말고, 무 게임


다시 말씀드리지만, 저는 초보 텃밭 농사꾼입니다. 자랑은 아니지만, 이번에도 무를 솎아줘야 할 타이밍을 어김없이 놓쳤지요. 시름시름 앓고 있던 배추에 집중하느라, 알아서 잘 자라고 있던 무에게 관심을 많이 주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새싹일 때 솎아줬어야 하는 무들이 이미 상당히 커버렸더군요.


지금이라도 솎아서 무가 크게 자랄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줘야겠다 싶었고, 늦었지만 솎아주기를 했습니다. 무는 이미 훌쩍 커서 새싹이 아닌, 무의 모양을 띄고 있었습니다. 구멍마다 자세히 관찰하며, 가장 잎도 튼튼하고 무 뿌리도 굵어 보이는 "356번 기훈 무"만 골라서 남기고, 나머지는 모조리 뽑아버렸습니다.


뽑혀나간 무(왼쪽)와 살아남은 무(오른쪽)


그 결과 이렇게나 많은 어린 무들이 패하여 뽑혀 나왔습니다. 텃밭에 가만히 앉아서 작은 구멍을 들여다보며, 약해 보이는 무를 골라 뽑아 제거하던 중, 머릿속에 오징어 게임 내용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강자만이 살아남고 약자는 제거되는 오징어 게임의 스토리가 마치 이 텃밭에서 재현되는 기분이 들었죠. 무 게임에서의 게임 종목은 바로 '제 선택'이고요. 제 선택을 받으면 살아남고, 아니면 처참히 제거되는 스토리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니 등골이 살짝 으스스 해지더군요. 드라마나, 동물의 세계에서만 강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네요. 평화로워 보이는 이 텃밭 속에서도 자연의 순리에 따라 강자만이 살아남는 건 똑같은 것 같습니다.

 

뽑혀나간 무 중 가장 튼실한 "218번 상우 무"와 "67번 새벽 무"



버릴 게 하나도 없는 무싹, 열무김치


텃밭표 무 게임을 시작하기 전에 인터넷으로 사전조사를 해보니, 이렇게 제거된 무들을 요리해서 먹으면 맛이 좋다는 글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저도 이 무들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고자, 처음으로 열무김치를 담가보기로 다짐했지요. 무들은 그대로 집으로 가져와 깨끗이 세척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먹기 좋은 크기로 싹둑싹둑 썰어내어, 소금 옷을 입혀 푹 절여주었습니다.



절이는 사이에 고추, 젓갈, 마늘, 양파 등 김장에 기본이 되는 채소들과 밀가루 풀을 섞어 김장 양념을 준비했지요. 열무김치를 담그려고 보니, 냉장고에 사용하고 남은 부추도 보이더군요. 김장도 초보인 저는, 모르는 게 용감하다고, 부추김치처럼 부추도 함께 넣어주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모든 김치 재료와 양념을 섞으면 끝!



제가 태어나서 세 번째로 해보는 김치 담그기였습니다. 한 시간 내외의 짧은 시간에 소량의 열무김치를 만들었습니다. 텃밭 가꾸기를 시작하고 올해 첫 김치를 담가본 게 엊그제 같은데, 천천히 김치 담그기도 익숙해져가고 있는 듯하네요. 5년 차 주부로서, 이제 어디 가서 주부 9단 명함 내밀어 볼까 봐요. 감사하게도 이 열무김치는 친정부모님께서 주말에 가져가신다고 합니다. 겸사겸사 효도도 한 숟갈 얹어봅니다.

이전 17화 텃밭 전쟁, 진격의 달팽이 군단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