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제 1
'나'는 착각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생각하는 나'는 착각일 뿐이다. 우리는 우리가 자유롭게 생각한다고 믿는다. 진취적이고, 능동적으로, 특정한 생각을 '하며' 삶을 살아간다고 믿는다. 마치 삶의 주도권은 우리에게 있는 것 같다. 그 관점에서는 매순간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떻게 행동하는가는 온전히 나에게 달려있다. 하지만 이는 아주 명백한 착각이다. 생각은 그저 마음속에 '나타날' 뿐이니까.
한 가지 사고 실험을 해보자. 패트리디쉬 위에 짚신벌레가 놓여있다. 이 짚신벌레는 자유롭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생명체일까? 짚신벌레에게는 화학주성(chemotaxis)이라는 특성이 있다. 쉽게 말해 특정한 화학 물질을 향해 이동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과학자들은 짚신벌레가 패트리디쉬 위에서 어떤 경로를 따라 이동할지 쉽게 예측할 수 있다. 심지어는 우리가 어떻게 화학 물질을 배치하는가에 따라 짚신벌레가 어떤 방향으로 이동할지 정할 수도 있다. 이렇게 보면 짚신벌레는 자신의 생각대로 행동하는 생명체는 아닌 것 같다. 짚신벌레는 그저 외부 자극에 따라 움직이는 생명체일 뿐이다.
이번엔 개미를 생각해보자. 개미는 자유롭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생명체인가? 개미는 페로몬이라는 화학 물질을 사용하여 소통한다. 페로몬을 따라 이동을 하기도 한다. 개미가 페로몬을 따라 이동하는 방식은 짚신벌레의 경우보다는 훨씬 더 복잡하다. 하지만 몇몇 과학자들은 복잡한 계산을 통해 개미가 페로몬을 따라 이동하는 방식을 모델링했다. 그러한 모델링을 활용하면 우리는 개미가 어떻게 이동할지 거의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적어도 어떻게 이동하느냐의 문제에 있어서는, 개미는 역시 외부 자극에 따라 움직이는 생명체일 뿐이다.
그렇다면 강아지는 어떤가? 아니, 우리 인간은 어떨까? 우리는 자유롭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생명체일까? 상상을 해보자. 외계인이 있다. 이 외계인은 매우 진보하여 인간이라는 종(species)에 대한 모든 지식을 다 알고 있다. 인간의 유전자에 대한 정보, 그 유전자가 환경적 자극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는지, 그리고 인간의 뇌에서 어떠한 일이 벌어지는지, 그 모든 정보를 다 알고 있다. 그렇다면 외계인이 보았을 때 인간이라는 종은 자유롭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생명체인가? 아니면 그저 외부 자극에 따라 반응하게 되는 생명체인가? 아마 후자에 가까울 것이다.
인간이 자유롭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생명체가 아니라는 사실은 연구를 통해 입증되기도 했다. 생리학자 벤저민 리벳(Benjamin Libet)은 인간이 자신이 움직이기로 결심했다고 느끼는 300밀리세컨드 전부터 뇌의 운동피질에서 활동이 나타난다는 것을 밝혔다. 이후 이어진 다른 연구들에서는 한 사람이 무언가를 하겠다고 선택하기 전부터 뇌는 이미 그것을 결정했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해당 연구에서는 실제로 뉴런의 활동을 계산하여 한 사람이 어떠한 선택을 내릴지 80퍼센트의 정확도로 예측할 수 있었다. 이러한 연구 결과들은 명백히 '나'는 착각이라는 사실을 지지한다.
사실 이는 '생각'이라는 것을 더 작은 요소로 환원하여 생각해보면 더 명백하다. 생각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생각이 전두엽의 신경 발화로부터 만들어진다는 사실은 모두가 동의할 것이다. 영혼이 생각을 만든다고 주장하는 시대는 이미 오래 전에 끝났다. 생각의 시작은 전두엽의 신경 발화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당신은 전두엽의 신경 발화를 조절할 수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다시 전두엽의 신경을 발화시키도록 선택한 것은 누구인가? 그 의지는 어디서 발생하는가? 또 다른 전두엽의 신경 발화? 이러한 설명은 순환 논리일 뿐이다. 많은 문제에서 태초의 시작을 설명할 수 없다. 과학자들은 빅뱅 이전에 우주가 어떠했는지 결코 알아낼 수 없다. 기독교에서는 이를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는 구절로 설명했다. 하지만 적어도 의식과 관련해서는 이러한 설명을 할 수 없다. 영혼의 존재를 믿지 않는 이상 태초의 자유로운 생각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생각은 의도를 가진 의식에 근원을 두지 않는다. 생각은 그저 의식 속에 '나타날' 뿐이다. 그리고 그 생각은 신경생리학적 사건, 즉, 하나의 심리적 사건일 뿐이다. 환경적 자극에 의해 나타나는 하나의 사건. 이 관점에서 보면 어떠한 사람이 당신과 정확하게 동일한 유전자를 지니고, 정확히 동일한 환경적 조건에 놓여있다면, 정확하게 당신과 동일한 생각을 할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물론 당신은 결심한 대로 행동할 수 있다. 하지만 무엇을 결정할지는 결정할 수 없다. 그러한 결정은 환경적 자극에 따라 마음속에 떠오를 뿐이다.
생각은 마치 팝콘과 같다. 우리는 모두 마음속에 팝콘 기계를 지니고 있다. 팝콘기계 속 팝콘은 불규칙하게 튀어오른다. '탁', '탁'. 언제 어떻게 어느 방향으로 튀어나올지 알 수 없다. 그저 적당한 온도, 습도, 그리고 압력에 따라 불규칙하게 튀어오를 뿐이다. 생각은 정확히 이와 같이 작용한다. 그저 마음속에 불규칙하게 떠오를 뿐이다. 당시 상황, 지나가는 말, 과거의 기억, 어릴 적 경험, 심지어는 그날의 날씨에도 영향을 받아, 다양한 생각이 우리 마음속에 떠오를 뿐이다. '탁', '탁'.
하지만 우리가 그토록 수동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긴 쉽지 않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능동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행동하곤 한다. 생각은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렇다 보니 모든 것은 생각하기에 달렸다며 마음속에 떠오르는 우울, 불안과 싸우기도 한다. 때론 마음속에 떠오른 생각에 아주 즉각적으로 반응하여 남들에게 불같이 화를 내기도 한다. 자신의 마음속에 어떤 생각이 떠오르고 있는지, 아니, 떠오른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 말이다.
중요한 건 몇몇 사람들은 이 비밀을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뛰어난 종교 지도자들이 그랬고, 비트겐슈타인과 같은 위대한 철학자들이 그랬으며, 스티브 잡스가 그랬다. 깊은 우울의 늪에서 벗어난 수많은 사람들이 그랬고, 반복되는 공황의 굴레에서 빠져나오는 사람이 그랬다. 당신이 이 비밀을 믿지 않아도 어쩔 수 없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 "나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생각하고 있는 걸." 안타깝지만 그러한 생각이 마음속에 떠올랐을 뿐이다.
'나'는 착각이다. 이 비밀은 많은 것들을 바꿀 수 있다. 지금 의심적은 마음이 들어도 좋다. 마음속에 그러한 생각이 떠올랐다는 걸 인지하고 다음 단계로 나아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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