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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담 Sep 17. 2023

달팽이는 어디에나 있다

1995년에  패닉이라는 2인조 밴드가 부른 달팽이라는 노래가 한동안 인기를 끌었다. 잔잔한 멜로디도 좋지만 노래가사를 찬찬히 음미해 보면 철학이 깃든 듯 심오하다.


학창 시절 처음 접한 팝송이었던 폴 사이먼과 아트 가펑클의 노래에도 달팽이가 등장한다.

"I 'd  rather  be  a  sparrow  than  a  snail. "( 달팽이가  되기보다는 참새가 되고 싶어요)

우리에게는 '철새는 날아가고'로  알려진 'El  Condor  Pasa'라는 곡이다.


큰 딸이 얼마 전에 집에서 달팽이를 키운 적이 있었다.

키우고자 의도해서 키운 건 아니고 밭에서 수확해 간 상추에  붙어 있던 달팽이를 아내가 딸에게 키워 보라며 준 것이었다.

 딸아이는 달팽이를 위해 집도 마련해 주고 상추도 뜯어다 주며 너무 잘 자란다며 기뻐했다.

그러던 어느 날 딸애는 며칠간 여름휴가를 다녀왔다.

딸아이가 돌아오던 날 달팽이는 더위를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떴다.

잠깐 이었지만 딸애는 우울했었다.

좌측부터 정상적으로 자랐으나 달팽이 피해를 입은 배추, 새로 심은 배추 모종, 말라서 성장이 늦은 배추 모종

어제 늦게 청도 농막으로 왔다.

밤새 천둥, 번개와 폭우가 내렸다.

비가 그친 아침 배추 밭으로 달려가 보았다.

김장을 위해 가을배추를 서른 포기 넘게 심었는데 10 포기가 넘는 배추가 말라죽었다.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딱히 어떤 이유라고 단언할 수도 없었다. 더운 날씨 때문인지, 퇴비나 비료 때문인지, 모종 자체의 문제인지 알 수가 없었다.

본가 근처에 있는 농가에서도 배추가 말라죽어 몇 번을 다시 심었다는 어머니의 말씀이 있는 걸 보면 우리 밭에서만 국한된 현상은 아닌 듯했다.

그냥 요즘 하기 좋은 말 '이상 기후'때문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래도 나에게는 아직 말라죽지 않은 스무 포기의 모종이 있지 않은가?

아직 살아남은 녀석들도 군데군데  구멍이 뚫려 상처 투성이었다. 모두 달팽이의 소행이다.

패닉이 노래하고 폴 사이먼이 노래했던 그 달팽이 말이다.

달팽이의 습격에 어머니는 내게 빨리 달팽이 죽이는 약을 사서 대령하라는 엄명을 내리셨다.


나는 인근의 농약상에 들러 입자로 된 달팽이를 없애는 약을 샀다.

그리고 오전 내내 청도 인근의 5일장을 떠돌았다. 5일장이 서는 날은 아니었지만 상설로 여는 가게도 있었다.

이서시장, 풍각시장, 육묘장, 농자재상, 종묘상  등을  돌아다녔지만 올해 가을배추는 이미 끝났다는 대답 일색이었다.

나는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청도 시장으로 가보았다.


그곳에는 있었다.

싱싱한 배추 모종이 지천으로 있었다.

주인아주머니에게 모종이 죽는 이유를 물었더니 놀라운 사실을 알려 주었다.

모종을 키울 때 비료를 많이 줘서 말라죽는다는 것이었다.

말의 진위여부는 알 수 없지만 내년에는 그 가게에서 모종을 사겠노라 약속을  하고 스무  포기의 모종을 사서 돌아왔다.


저녁 즈음에 비예보가  있어서 서둘러야 한다.

나는 사온 배추 모종을 빈자리에 하나씩 정성 들여 심고 달팽이 잡는 약을 배추 모종 하나하나에 뿌렸다.

"오, 불쌍한 달팽이여. 정말  미안하구나!"


우리가  배추농사에 이렇게 공을 들이는 이유는 이 배추가 자라서 겨울 동안 우리 가족을 먹여 살릴 든든한 김장이 되고 내년 봄까지  우리 가족의  중요한 식재료이기 때문이다.

배추를 살리기 위해 내가  달팽이들에게 행한 이 소행에 대한 충분한 변명이 되었으면 한다.


https://youtube.com/watch?v=z8M-gacP6o8&si=ERPI8Ji6mArSHan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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