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고단한 몸을 이끌고 퇴근 후에 주방으로 들어가 밥부터 안쳤다. 아내는 작은 방에서 '이제 와요'하는 한마디만 던지고는 하던 일에 열중이다.
퇴근 후 주방으로 직행하는 생활이 일상이 된 것도 어느덧 한 달은 된 듯하다.
오늘은 쌀에 보리를 섞지 않고 쌀밥으로 할 생각이다. 보리밥이나 아내가 좋아하는 콩이나 흑미를 넣는 잡곡밥도 가끔 하지만 밥 하는 시간이 길어 배고픈 저녁 시간에는 쌀밥이 제격이다.
요즘 전기밥솥은 압력솥도 겸해 얼마나 잘 만들어졌는지 밥 맛도 좋고 밥물을 대충 맞춰도 밥이 타거나 설 익는 일은 절대 없다.
압력밥솥의 전원을 작동시키고 반찬을 준비한다. 혼자 먹는 저녁이라 많은 반찬을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오늘은 간단하게 된장찌개랑 부추김치, 그리고 파김치를 반찬으로 해서 저녁을 먹으려고 생각 중이다.
지난주에는 매운 소고기 국을 끓여 삼일은 먹은 듯하다.
복잡하게 반찬 만들고 국 끓이고 할 필요 없이 라면 끓여 먹으면 편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유감스럽게도 나는 라면을 즐기지 않는다.
젊어서는 자주 먹었지만 나이가 들수록 라면이나치킨, 그리고 패스트푸드같은 음식들이 당기지 않는다.
늙었다는 징후인가 하는 생각도 든다.
나는 요리에 진심이었다.
몇 년 전에는 저녁마다 미역국, 콩나물국, 김칫국, 배추된장국, 소고기 국을 끓이고 취나물, 미나리, 동초, 봄동으로 나물 무침을 만들기도 했었다.
그리고 비 오고 으슬으슬 추운 날에는 묵은 김치와 콩나물, 식은 밥을 이용해 갱시기를 만들어 가족들의 입을 즐겁게 했었다.요즘은 게을러서 주방에 잘 가지 않지만 한 번씩 온 가족이 모일 때면 딸들이 좋아하는 비빔국수나 잔치국수를 만들어 모두에게 먹는 즐거움을 나눠 주기도 한다.
아내는 작년 이맘때쯤 재수 끝에 공인중개사 1차 시험에 합격했다. 직장 다니면서 자투리 시간을 활용해 시험에 도전한 아내의 용기에 박수를 보냈다.
그렇지만 한 달 전부터는 내가 고단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
아내는 오는 10월 2차 시험 때까지 주방 살림살이에서 손을 떼겠다고선언했다. 일방적으로.
밥하고 반찬하고 설거지하는 것이 오롯이 내 몫이 되었다.
큰 딸이 있지만 자기 앞가림하기도 바쁜 청춘이라서 굳이 아쉬운 소리는 하고 싶지 않았다.
어떤 날은 퇴근 후 나는 너무 피곤한 나머지 밥만 챙겨 먹고 뒷정리도 안 하고 잠자리에 든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틀이 지나도 설거지가 그대로 쌓여 있었다.
그때 나는 속으로 '이거 장난 아닌데'하는 심정으로 밀린 설거지를 시작했었다.
내가 한 번씩 게으름을 피우거나 살림에 진정성이 보이지 않으면 아내는 불쑥 한 마디씩 던진다.
"노년은 내가 먹여 살릴 테니 살림 열심히 하소"
아내의 공부하는 기세를 보면 공인중개사 2차는 따놓은 당상인 듯하다.
경제적으로 넉넉하고 풍요로운 나의 노년을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진다.
그런데 새로운 걱정거리가 하나 생겼다.
아내는 공인중개사 시험에 합격하고 나면 손해평가사 시험에도 도전하겠다는 폭탄선언을 했다.
요즘 유망한 자격증이어서 꼭 도전하겠다는데 나는 표정관리를 할 수 없었다.
나의 지난한 살림살이가 언제까지 계속될지 그것은 순전히 아내의 선택에 달려 있다.
세상 편하게 사는 나와는 전혀 다른 삶에 진심인 아내의 모습이 가끔씩은 존경스럽기까지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