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건축으로 새 아파트에 입주하신 외삼촌이 어머니께 손수전화를 하셔서 시간 내어 놀러 오라는 말씀까지 하셨단다.
그게 외삼촌과 어머니의 마지막 대화였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어머니께 외삼촌댁에 모셔다 드리겠다고, 한번 가시라고 말씀드렸지만 끝내 가지 않으셨다. 어머니는 그때 외삼촌을 찾아가지 않으신 걸 자책하셨다.
외사촌 동생에게 연락해 부고장을 받았다.
아내와 퇴근 후 저녁에 같이 조문하기로 했다. 팔순이 넘으신 어머니를 굳이 모시고 가고 싶지 않았다. 몇 년 전에 장모님의 장례식과 큰어머니의장지를 다녀오신 어머니가 우울증으로 오랫동안 힘들어하신 기억이 났다. 그래서 나는 어머니께 내가 진심으로 어머니의 마음을 전하겠노라 말씀드리고 어머니를 안심시켜 드렸다.
퇴근 후 검은 양복에 검은 넥타이를 매고 종합병원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낮에 내린 비에 젖은 거리는 을씨년스러운 장례식장의 분위기를 더 우울하게 만들었다.
빈소 앞에서 향을 사르고 잔을 올리는 중에 아내는 이미 눈이 붉어져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절을 하고 외사촌 동생을 위로하며 돌아 나오면서도 아내의 눈물은 그치질 않았다.
문득 생전의 외삼촌이 떠올랐다.
가부장적이고 무뚝뚝하셨지만 정이 많았던 외삼촌은 우리 부부가 결혼하고 처음 찾아뵜을 때
아내에게 살갑게 대해 주셨다. 외삼촌의 영정 사진을 보면서 문득 아버지의 모습이떠올랐다.
외삼촌과 동갑내기이신 아버지를 떠올리자다가올아버지와의 이별이 생각나서눈가가 붉어졌다.
애써 다른 생각을 하며 떨쳐 내려노력했다.
일주일마다 찾아뵙는 아버지는 갈수록 예전의 강인함은 사라지고 하루가 다르게 나약하고 힘없는 노인으로 변모하고 있다.
최근 몇 년간 집안의 많은 일가친척분들을 떠나보냈다.
학창 시절 몇 번 뵙지 못했던 큰고모님의 장례식장에서는 쏟아져 나오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아마도 어린 시절 방학 때 고모집에 놀러 가서느꼈던 고모님의 인간미와 따스하고소중한 기억 때문이었으리라.
그리고 몇 해 뒤 집안의 큰 어른이신 큰아버지와의 이별이 있었다. 그때 생전 처음 장지에 따라가서 산소에 안장되시는 큰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2020년엄마처럼 따르던 큰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췌장암으로 입원해 계신 큰어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아무리 착하고 성실하게 살아도 오히려 세상은 야속하다는 생각을 했다.
큰어머니가 돌아가시고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장모님이 돌아가셨다.
아내의 슬픔을 마주하며 나는 왜 아내만큼 슬퍼하지 못하는지 괴로웠다.
그것이 나의 아내에 대한 사랑의 깊이는 아닌지 부끄러웠다.
장모님의 장례식장에서 나는 생전 처음 입관식을 보았다. 생전 모습처럼 생생하던 장모님의 얼굴에서 느낄 수 없었던 온기를 원망하며 목놓아 울었다.
그리고 시간이 모여 세월이 되고 기억은 세월을 핑계 삼아 망각의 가면을 덮어 섰다.
나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밥도 잘 먹고 술까지 마셔가며 그럭저럭 또 살아가는 중이다.
큰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는 명절에도 시골에 가지 않는다. 추석과 설에 온 가족 일가친척이 시골 촌집에 모여 도란도란, 왁자지껄하던 명절의 추억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