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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을꾸다 Apr 27. 2022

몰랐던 건 내가 아니라 그였다.

화가 나면 못하는 영어도 술술 나오는 기적.


하나의 동에 하나의 세탁실이 있다. 세탁실에는 세탁기와 건조기가 각각 2대씩 있고 각 집마다 배정된 스토리지가 있다. 공용 세탁 공간을 쓰는 것이 익숙하지도 않고 내키지도 않았지만 거의 7개월째 살다 보니 이제 제법 익숙해지고 있다.


최대 12가구가 하나의 동에 살 수 있는데 현재 몇 가구가 살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아직까지 세탁하러 가서 자리가 없어 헛걸음한 경험은 2번뿐이었다. 그 외에는 여유 있게 세탁기나 건조기를 동시에 2개를 이용하고 오기도 했다.


남편이 퇴근하고 오자마자 세탁기를 돌리러 갔다. 그런데 이미 작동이 끝났지만 양쪽 모두 빨래가 들어있었다. 조금 망설였지만 원래 시간이 끝나면 꺼내고 다들 이용하길래 나도 그나마 적게 들어있는 쪽을 열고 빨래를 꺼냈다.

꺼낸 빨래들을 세탁기 위에 올려두고 내 빨래를 돌리려는데 빨래 주인이 등장했다. 알고 보니 양쪽 모두 그의 빨래였다. 그는 조금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더니 나에게 말했다.
"넌 내가 올 때까지 빨래를 꺼내지 않고 기다렸다가 다시 와서 세탁기를 이용해야 했다. 빨래를 마음대로 꺼내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좀 당황스러웠다. 분명 내가 아기 돌보느라 빨래 끝나는 시간을 맞추지 못하고 늦게 왔을 때에도 내 빨래가 꺼내진 적도 있었는데 그게 잘못된 것이라니. 일단 기분 나빠하는 그에게 내가 잘 몰라서 그랬고 다음번에는 조심하겠다고 사과를 했다.



그리고 그는 건조기 2대에 자신의 빨래를 나눠 넣고서는 시간 맞춰서 올 테니 이번에는 건들지 말고 기다리라고 말하며 나갔다. 세탁기는 39분, 건조기는 45분인지라 나는 내 빨래가 끝날 시간보다 5분 정도 지나서 내려가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흘러 내 세탁도 그의 건조도 다 끝날 때가 되었다. 세탁실로 내려갔는데 그는 아직 오지 않았다. 세탁기가 그랬듯 건조기 두대도 작동이 끝난 채로 주인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찌할지 망설이는 사이에 다른 세탁기를 이용한 이웃이 건조기를 이용하러 내려왔다. 나는 상황을 설명하며 건조기의 빨래를 꺼내지 못해서 지금은 사용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그 이웃은 왜 기다리고 있느냐며 그냥 꺼내 두고 사용하면 된다고 말했다. 나도 그걸 알지만 그가 당부를 하고 가서 망설이는 중이라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였다.


그가 문을 열고 세탁실로 들어오자마자 나는 그에게 말했다.
"너는 약속한 시간보다 너무 많이 늦었다. 나도 시간이 중요한데 15분이 넘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냥 꺼내서 사용해도 되지만, 네가 약속하며 부탁했기 때문에 기다린 것이다. 아까는 잘 몰랐지만 알고 보니 이곳은 공동 이용 공간이기 때문에 작동이 끝난 상태면 내가 사용을 하는 것이 맞는 것이었다."


어설프고 부족한 영어 어휘와 회화 실력으로 아까 느꼈던 당혹감과 세탁실에 쭈그리고 앉아서 기다리며 쌓인 분노를 가득 담아 다다다다 쏟아냈다.




그는 늦어서 미안하다고 하면서도 살짝 정색하더니 어디서 그런 말을 들었냐며 반문했다. 그러자 고맙게도 다른 세탁기를 이용한 이웃이 거들며 말했다. 세탁실 내부에도 세탁실 입구에도 규정이 적힌 종이가 붙어있다고 가리키며 그곳에 다 적혀있다고 알려줬다. 그러자 그는 흘깃 안내문을 보더니 성의 없는 태도로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자기 빨래를 휙휙 챙기더니 건조기 먼지망 청소는 하지도 않고 가버렸다.


그가 세탁실을 나가고 난 뒤 거들어준 이웃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아까처럼 1대 1 상황이었으면 그는 또 나를 비난하거나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 같았다. 가급적이면 잘 통하지도 않는 언어로 갈등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아서 그냥 내가 미안하다고 했던 터라 사실 억울했다. 그런데 억울함도 풀리고 그가 잘못 알고 있던 부분도 알려주게 되었고 나의 당혹감도 표현할 수 있었기에 속이 후련해졌다.

안내문이 붙어있어도 제대로 읽지 않는 사람들이 참 많다. 한국에 있을 때도 그런 순간들마다 답답함과 짜증을 느끼곤 했다. 물론 나도 그럴 수도 있고, 알고 나서라도 조심하면 되지만, 그래도 싫었다.

오늘 같은 경우에 대한 내용이 안내문에 있는지는 나도 잘 모르긴 했다. 이용 가능한 시간만 확인하고 나머지는 제대로 읽지 않았던 터라 불쾌해하는 그에게 사과를 했던 것이다. 내가 규칙을 잘못 이해하고 있었는 줄 알았다.

그는 누군가가 자신의 빨래를 만지는 것이 싫었다면 내가 타이머를 꼭 맞추듯이 자신도 그 정도는 했어야 했다. 그리고 이미 불편한 상황 뒤에 나에게 약속 혹은 당부를 했다면 더욱 시간을 잘 지켰어야 했다. 그런데 나는 언제 올 지 모를 그를 기다리며 거의 20분을 세탁실과 집을 오가며 시간을 날렸다.

조금 더 합리적인 대처법이 있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그래도 나름대로 당황스러운 상황에서 나의 의견을 제대로 전달하고 해결했다는 점에서 개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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