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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lair Mar 06. 2024

이제 그만 보내줘야 할 때

오래된 신발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구나라고 깨달았던 것은 고작 '신발'이었다.



서울에 올라가면 하루에 만보는 기본으로 2만보까지 걷고 있다. 오랜만에 가는 서울은 가봐야 할 것도 만나야 할 사람도 해야 할 것도 얼마나 많은지 쉴 새 없이 움직이게 된다.



여름 내내 신는 신발은 크록스였다. 제주는 가을이 되었어도 정말 더웠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크록스 슬리퍼를 신고 서울에 올라가게 되었다. 문제는 애프터눈티 타임(afternoontea time)을 하러 가는 날 벌어졌다. 옷은 티타임과 어울리는 근사한 옷을 들고 갔는데 미처 신발은 챙기지 못했던 것이다. 시댁에서 지냈으니 어머님의 신발장을 열었다. 그중에 마음에 쏙 들지는 않지만 제법 어울리는 신발을 발견했다. 다행이었다. 그 신발을 신고 앞의 300m 정도를 걸어갔을 때였다. 갑자기 발에서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 신발은 통굽으로 생긴 신발이었는데 바닥의 굽이 바스러지고 있었다. 어떻게 생긴 신발이길래 느낌이 이렇지? 하고 굽을 잡아보았는데 힘없이 떨어지고 말았다. 그러니까 한쪽은 바스러지고 한쪽은 멀쩡한데 전체 분리된 상태. 한쪽은 굽이 있고 반대쪽은 없으니  발이 절룩거릴 수밖에... 그래도 집에서 가까워 다행이었다. 다시 집으로 돌아가 갈아 신으면 되었으니까.



다시 집으로 돌아가 어머님의 신발장을 뒤적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원피스에 크록스 슬리퍼를 신을 수는 없었다. 잠시뒤 다시 내 취향은 아니지만 옷과 그럭저럭 어울리는 구두를 발견했다. 조금 올드해 보이는 디자인이기는 하지만 올드패션이 유행이니 괜찮겠지 싶었다.



목적지 까지는 버스로 20분 정도, 지하철로는 5 정거장의 거리였다. 그곳에 내려 잠시 볼일을 보고 차를 마시러 가는 스케줄이었다. 목적지에 도착해서 볼일을 봤을 때만 해도 괜찮았다. 그리고 이제 예약한 시간에 맞춰 차를 마시러 가야 하는데 글쎄! 발의 느낌이 이상했다.



이번에는 신발의 중간 부분이 떨어져 버린 것이다. 마침(?) 그곳은 쇼핑몰이었다. 어쩔 수없이 가까운 매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신발을 하나 구매할 수밖에 없었다.



급하게 사는 신발치고는 꽤 마음에 들었지만,

갑자기 하는 소비라 좀 당황스럽기도 했다.





급하게 산 메리제인 슈즈, 예쁘잖아!







약속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시어머니에게 구두가 두 개나 그렇게 되었노라고 말씀드렸다. 워낙 물건에 욕심 없으신(그러나 물건은 많은) 어머니는 별로 개의치 않아 하셨다.



"그거 예전에 한참 신고 다니다가 내버려 둔 거야~ 오래된 거라 그랬나 보다. 신경 쓰지 마" 내 신발이 아니라 걱정했지만, 신발 주인이 괜찮다 하시니 안심이 되었다.



이번일을 겪으면서야 깨달았다. 신발이야말로 영원히 잘 관리하며 신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다행이다 싶었다. 사실 나는 늘 값비싸고 예쁜 신발을 소장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아직 내 수준에는 아직 맞지 않는 것 같아서 미루고 미뤄두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 일을 겪으며 그동안 비싼 신발을 사두지 않아서 다행이다 싶었다. 비싸게 사서 아낀다고 신지 않았다가 망가지면 더 마음이 아플 것이기 때문이었다.










문득  글을 쓰다가 신고 있던 신발을 내려다보았다. 무려 10년이 된 운동화이다. 원래 운동화를 자주 신는 스타일은 아니라 운동화를 사는 일은 드문데 그래도 운동화가 10년이나 되었다니 참 놀랍다. 어떻게 10년인 것을 기억하냐면 아이 낳기 전에 산 신발이라 정확히 기억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결혼하던 그 해에 산 신발이 분명하다. 운동을 시작하겠다고 난리 치며 구매했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그때의 난 장비 없이 운동을 시작하지 못하는 하수였다).



10년을 신었어도 매일 신고 다닌 신발이 아니라 괜찮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자세히 보니 신발이 군데군데 벗겨져있었다. 그래, 운동화 10년이면 잘 신었지! 오랫동안 버리지 않고 꾸준히, 끝까지 잘 신은 나를 칭찬해주고 싶었다.



10년된 운동화의 흔적








사실 올해는 롱부츠가 사고 싶었는데 아니  작년부터 사고 싶었는데 여태껏 사지 않았다. 가지고 있는 신발이 많은 것은 아닌데 신발장을 열면 신발을 사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남편은 운동화 2, 정장신발 1, 샌들 1, 슬리퍼 1이 가진 전부이다. 그러니 상대적으로 내 신발은 엄청나게 많아 보인다. 그래서 더욱이 더 이상 사면 안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게다가 대체 제주에서 롱부츠를 신고 어딜 갈 수 있을까 싶기도 하고 그럼 털이 있는 숏어그 라도 사서 따뜻하게 지낼까 싶어지기도 하지만 계속 상상만 열심히 하고 있다.

 


이렇게 혼자 한참을 생각만 하다 보면 물건을 갖고 싶어 하는 내 마음이 영원하지 않을 것이라는 마음이 든다. 영원히 신을 수 있을 것만 같던 신발도 오래되면 삭아버리는 것처럼, 물건에 대한 내 마음도 분명 영원하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도 10년 된 운동화와 더불어 가지고 있는 남은 신발도 열심히 신어봐야겠다. 나는 내가 가진 물건을 이렇게 끝까지 열심히 사용하는 것이 너무 좋다. 남들은 대체 여태 왜 안 버리냐고 구박하지만 나는 끝까지 알뜰하게 신고 입는 것이 정말 기쁠 뿐이다.



역시 가진 것을 소비하는 삶이 최고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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