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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lair Jan 12. 2022

제주 겨울

잊을만하면 눈이 온다.


안전 안내 문자

10일 밤~ 12일 오전 많은 눈 예상(해안 1~3cm, 중간산 3~8cm, 산지 30cm)
대중교통 이용, 차량 운행 자제 , 월동장구 장착, 제주경찰청 교통통제 수시 확인



엊그제 오후 3시, 안전 안내 문자를 확인하고 걱정 근심이 늘어났다. 저녁부터 눈이 온다는 예보가 있다.

'또 눈이야?'라고 생각했다. 요새 일기예보가 참 잘 맞는다. 저녁이 되니 자꾸만 창문을 열어 창밖을 확인하게 된다. 늦은 저녁 밖엔 비가 내렸다. '휴, 다행이다. 제발 그냥 비만 오고 말았으면' 생각하며 잠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벌떡 일어나 커튼을 걷어서 날씨부터 확인했다. '다행이다 비만 왔네.' 그렇게 잠깐 나는 안심할 수 있었다.  



오늘 오랜만에 약속이 있었다. 아이 등원을 시키고 바로 앞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다. 제주도에 아는 사람이라고는 앞집 부부 내외와 그리고 최근에 알게 된 언니 한 명. 거의 한 달 만에 보기로 약속했는데 비가 온다니. (지난번 첫 만남에도 비가 억수같이 왔다. ) 그래도 눈이 안 와서 다행이다 생각하고 아침부터 분주하게 씻고 준비를 했다. 사실 날씨가 추우니 아침에 씻는 것도 너무 춥고, 늦게 잔 탓에 피곤했지만 그래도 누군가를 아주 오랜만에 만나는 날이니 없던 기운이 조금 솟았다. 나는 씻고 나와 아이를 깨워 등원 준비를 시키며 화장을 하기 시작했다. 마스크에 화장이라니... 코로나 이후로 한 달에 한두 번 간신히 하는 화장. 이제 선크림이 화장의 끝인데... 나는 오랜만에 다양한 화장품을 사용했다. 그래 이건 말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볼터치도 살짝, 꾸안꾸로 화장을 끝냈다.




화장을 다 하고 불안한 마음에 창문을 열어 밖을 쳐다봤다. 감겨있던 눈이 절로 떠지는 순간. 내 눈을 의심했다. 분명 방금 전까지 비가 조금씩 내렸던 것 같은데... 눈발이 날리기 시작한다. 아 제발.. 제발.. 그리고 조금씩 쌓이기 시작했다. 아... 분위기기 좋지 않다. 잠시 후 눈폭풍이 날리기 시작했다. 집을 삼킬 정도의 거센 바람과 눈이 함께 왔다. 순식간에 세상은 하얗게 변했다.




왜 이렇게 걱정하느냐고? 고작 눈 따위에? 우리 집에 산 위에 있다고 이야기했던가? 여기가 중간산 정도일까... 생각보다 고지가 높아 이상하게도 배달차가 오지 않고 마트 배달도 전혀 되지 않는다. 그 정도는 그냥 불편을 참으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눈이 오는 것은 상황이 달랐다. 눈이 오면 큰길로 내려갈 수가 없다. 고작 차를 끌고 5분 정도 내려가면 될 그 거리가 눈이 오면 마비가 된다. 제설차량? 코빼기도 볼 수가 없다. 지지난 주말 눈이 왔을 때 우리는 꼬박 이틀을 눈에 갇혀있었다. 이틀 후 날씨가 회복되며 눈이 다 녹자 그때서야 우린 차를 타고 산 아래로 내려가 아이 병원도, 마트도 다녀올 수 있었다. (이렇게 말하니 마치 한라산 꼭대기에 살고 있는 느낌이다. 후후)



그래도 그때는 아이의 겨울방학이었다. 거기에 감기까지 심하게 걸려있어서 특별히 밖을 나가지 않아도 되었다.  이번엔 다르다. 일단 어린이집에 차량 운행 어떻게 되느냐고 연락을 했다. 전화를 받는 차량 선생님의 목소리가 심각했다. 눈폭풍으로 앞이 보이지 않아 더 이상 차량 운행을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사실 나도 차량을 못 탈 것 같아 전화를 드린 것이었다. 아이와 나의 외출 준비가 모두 끝낸 상태에서 눈이 그렇게 내리기 시작할 줄은 몰랐다. 마치 눈이 휘몰아치는 모습이 나에게 나가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 같았다.






제주도에 이렇게 눈이 많이 오다니
나만 몰랐네






지금 내가 제주에서 겪은 눈만 첫눈, 3~4주 전 두 번째 눈, 2주 전 폭설, 오늘 벌써 4번째이다. 작년에 서울에서 눈을 두 번 봤던가... 그마저도 한 번은 소리 소문 없이 왔다 갔고, 겨우 다른 한번 눈이 많이 와 아이와 딱 한번 눈싸움을 한 기억이 있다. 재작년도, 재재작년도 눈이 많이 와서 고생한 기억은 없는데... 오히려 서울보다 제주도에서 눈을 더 많이 만난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어... 이상하다. 제주도에는 왜 눈이 안 올 거라 생각했지.



나는 막연하게 제주도는 비가 많이 오지.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도착하는 첫날도 비가 주룩주룩, 그다음 이사하는 날도 부슬부슬 그러다 급 화창해지고 또다시 비가 부슬부슬 , 흐린 날씨가 계속되다 갑자기 화창. 뭐... 날씨라는 게 보통 이러한 패턴이긴 하지만 날씨가 따뜻한 곳이니까 비가 오겠지 눈으로 고생할 일은 없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사하려고 집을 보러 다닐 때 내가 주택에 살게 된다니 엄마가 "거긴 동파는 안되?" 궁금해하셨다 그래서 내가 부동산 아주머니께 물어봤는데 "제주도는 날씨가 따뜻해서 동파되는 일은 없어요" 라고 들었다. 난 왜 그 말의 의미를 제주도에는 눈이 안 와요라고 생각했을까. 하하하. 바보. 나는 어쩌자고 이렇게 산 위에 살아서 눈이 오면 오도 가도 못하는 것일까.











눈이 잦아든다. 오... 눈이 녹는다!!!!!!!!!!

나도 모르게 환호성을 질렀다. 눈을 이렇게 두려워한 적이 내 인생에 있었을까?



우리는 진작 등원을 포기하고 나는 서둘러 아침밥을 하고 있었는데 (아이고 아까운 내 화장...) 눈이 조금씩 조금씩 녹기 시작했다. 도로에 쌓인 눈은 점점 녹아 도로의 본연의 모습을 조금씩 나타내고 있었다. 이제 밥도 국도 다 준비되어 먹을 참인데 마음이 동요했다. 거의 11시가 가까워온 시간. 그러나 지금이라도 등원하면 점심은 유치원에서 먹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 등원이다!!!! 아이는 등원해서 친구들과 눈 놀이할 생각에 신나서 뛰어갔다.



나는 아이를 등원시키고 도서관으로 향했다. (오늘의 약속은 취소되었다.) 그런데 다시 차에 타자마자 눈발이 날렸다. 잠시 '눈발이 거세지면 집으로 다시 못 올라갈 텐데'라는 생각을 잠시 했지만 이제 어쩔 수 없었다. 도서관으로 가는 그 짧은 시간에도 눈이 왔다가 그쳤다를 반복했다. 도서관에 도착해서 빌린 책을 반납하고 새로운 책을 빌려서 나오는데 바람이 너무 차다. 그리고 어마어마한 바람이 분다. 하늘 높이 솟은 야자수가 바람에 날리는데 부러지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그래도 눈이 내리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야자수가 바람을 이겨내고 있다.




도서관에서 가장 가까운 카페로 향했다. 카페에 앉아 있는 내내 밖의 날씨는 변화무쌍했다. 보슬보슬 눈이 내리다가 우박이 내리다가 갑자기 해가 뜨더니 다시 눈이 펑펑 내리고를 반복하며 난리부르스를 친다. 그러나 역시 실내에서 바라보는 눈이 오는 풍경은 조금 낭만적이었다. 오늘 다행히 적당한(?) 눈이 내려 내가 산에서 내려와 이렇게 따뜻한 커피를 마실 수 있게 된 것에 감사했다.




카페에서 바라본 눈 내리는 제주골목길





산 위에서 사는 삶은 참 평화롭다. 눈이 내린 정원을 바라보는 일은 행복이고 즐거움이다. 때론 눈 위에 찍힌 작은 고양이 발자국을 보는 것도 얼마나 귀엽고 낭만적인지 모른다. 그러나 제주의 눈은 이제 조금 두렵다. 특히나 눈이 가득 온 날, 겁이 많은 내가 차를 끌고 눈을 헤치고 산 아래로 내려갈 자신은 없다. 눈이 내린 한라산의 풍경을 보는 것은 너무도 아름답지만 앞으로 남은 겨울, 제주도에서의 눈은 조금 덜 보고 싶고, 덜 만나고 싶다. 역시 겨울의 제주 낭만은 조금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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