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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상과 허상 Oct 18. 2024

깊은 명상

'깊은 명상'은 지금까지 널리 사용되고 있는 명상을 지칭하며, '활동명상'과의 구분을 위해 사용하는 이름이다.

 

집중명상

정신집중(精神集中)은 온 마음의 초점을 어떤 한 일에만 몰두하는 행위이다. 정신집중의 행위가 이루는 정신이 집중된 상태에서는 아무 잡념도 없으며, 옆에 있는 사람이나 주위의 소음 등에도 전혀 구애 받지 않는다. 사실 정신집중 없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운동, 공부, 붓글씨, 바둑, 피아노 등 일을 할 때에는 정신을 집중하여야 원하는 결과가 나오게 된다. 공부나 바둑 등의 경우에는 두뇌의 개발을, 운동이나 피아노 등의 경우는 동작의 반복을 통하여 몸 속에 잠재하고 있는 제2의 기억을 계발하며, 궁도, 사격 등의 경우에는 순간을 다루는 인지능력을 계발하게 된다. 

정신집중은 몸을 의미하는 정(精)과 마음을 의미하는 신(神)이 하나를 이루는 정신통일(精神統一)을 이루게 된다. 또한 정신통일은 정신일도하사불성 (精神一到何事不成)의 고사성어와 통한다. 즉, 몸과 마음이 하나로 모이면 이루지 못할 것이 없다는 뜻이다. 우리의 선조들은 이러한 정신통일을 단전호흡 등의 의식적 호흡과 연결하여 마음을 닦는 수양법으로 사용하였으며, 그 효과는 오늘날 현대사회의 스트레스성 문제점들을 다루는 정신의학 등에서 크게 대두되고 있다.


참선

잔잔한 호수위에 돌멩이 하나가 떨어지면 떨어진 위치에서부터 그 주위로 동그란 물결의 파문이 퍼져 나간다. 고요한 마음에 한 생각이 일면 그로부터 생각의 꼬리가 꼬리를 물고 과거와 현재를 넘어 눈덩이처럼 불어 나게 된다.

참선(參禪)의 수행에는 과거도 미래도 현재도 떨어지는 돌멩이도, 피어나는 생각도, 아무것도 없다. 다만 고요한 마음을 유지하게 할 뿐이다. 참선의 호흡은 일반적으로 복식호흡을 사용한다. 숨을 천천히 코로 모아 들이쉬고, 아랫배로 내려 보냈다가, 숨을 잠시 멈추고, 입을 통하여 숨을 내쉬게 된다. 이때 숨을 내쉬는 시간이 정지하는 시간보다 길고, 정지하는 시간이 들이쉬는 시간 보다 길게 한다. 들숨보다 길게 하는 날숨의 호흡을 안정된 호흡으로 본다. [참고: 김승혜, 서정범, 길희성. 선불교와 그리스도교. 124]

참선은 바쁜 생활 환경을 떠나 조용한 분위기에서 행함이 효과적이다. 그러나 참선의 자세는 바쁜 일상 생활 중에서도 가질 수 있다. 바쁜 중에서도 틈틈이 화두를 참구하며 정진하는 자세는 참선의 길을 밝혀준다.


화두(話頭)

간화선(看話禪)의 핵심인 화두는 공안(公案)으로 알려져 있기도 한다. 화두의 '화(話)'는 말이라는 뜻이며, '두(頭)'는 머리, 즉 앞서 간다는 뜻이다. 즉 화두는 말보다 앞서 가는 것, 언어 이전의 것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화두(話頭)는 참선의 수행법으로, 화두를 통하여 일체의 말이나 생각을 끊어버리고 고요한 마음의 상태인 공(空)의 상태에 이르는 수행 방법이다. 

한편 공안의 '공(公)'은 공중(公衆) 또는 누구든지 라는 뜻이며, '안(案)'은 방안이라는 뜻으로, 누구든지 성불할 수 있는 방안이라는 의미이다. 공안을 옛 선사들이 제자들을 일깨우기 위해 흔히 사용했던 선문답, 과거의 사건 사례로 본다면, 화두는 공안 가운데 핵심이 되는 언구(言句)이다.

화두의 참구는 사유나 사색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의심만을 계속하는 것이다. 화두를 가지고 간절한 마음으로 의심하기를 마치 닭이 알을 품은 것과 같이, 고양이가 쥐를 잡을 때와 같이, 어린아이가 엄마를 생각하듯이 하면, 화두에 대한 의심이 풀리고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선종(禪宗)의 조사들이 만들어 낸 화두는 1,700여개의 종류가 있으며, 그 중 널리 알려진 화두는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 '뜰 앞의 잣나무', '마른 똥막대기' 등이 있다. 또한 가장 많은 고승들이 깨달었다고 하는 무자 화두법도 있다.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 (구자무불성-狗子無佛性)'은 어느 한 수행승이 조주(趙州) 선사를 찾아가서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하고 물었을 때 조주 선사가 '무(無)'라고 대답하여 생긴 화두법이다. 부처님은 일체 중생에게 불성이 있다고 하였는데, 조주 선사는 왜 없다고 하였는가를 의심하는 것이 '무자화두'법이다.

화두는 크게 의심하는 것이다. 화두의 '큰 의심'은 원인을 찾고 이해하려는 목적을 가진 질문의 형태와는 달리, 마음이 열려서 스스로 의심이 사라질 때까지 '무엇인가?' '무엇 때문에?' 등의 의심 자체만을 계속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해석 없는 순수한 의심을 참선에서는 대의정(大疑情)이라고 한다. 이 대의정은 '화두를 참구하면 반드시 깨닫는다'는 대신근(大信根)과 '다른 사람들도 다 하는데 나라고 왜 못하겠는가' 하는 대분지(大憤志)와 더불어 참선을 할 때 꼭 갖추어야 하는 참선의 세 요소이다. 

화두를 만트라(Mantra)로 보는 경우도 있지만, 화두와 만트라(Mantra)에는 분명히 차이가 있다. 같은 점으로 화두(話頭)와 만트라(Mantra)는 수행방식에서 정신 집중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 사용된다. 차이점은 화두는 수행방식에서 크게 의심하는 것임에 반해, 만트라는 수행방식에서 만트라를 만트라가 사라지고 무념무상 (無念無想)의 경지에 이를 때까지 만트라를 반복하는 것이다. 만트라는 본래 티베트어로 진언(眞言: 참된 말, 진실한 말, 진리의 말)의 뜻으로, 영적(靈的) 또는 물리적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고 여겨지는 발음, 음절, 낱말 또는 구절이다. 


단전호흡

단전호흡(丹田呼吸)은 정기신(精氣神) 삼단전(三丹田) 원리를 바탕으로 전신(全身)의 기맥(氣脈)이 단전과 상통하는 호흡법이다. 단전호흡이라는 말이 우리에게 낯선 말은 아니다. 우리의 선조들은 제하3촌하단전(臍下三寸下丹田), 즉 배꼽에서 3~5㎝ 아래의 하복부 위치에 가상의 지점인 단전(丹田)을 기(氣)의 근원지로 보고 이에 관한 많은 가르침을 남겼다. 단전 호흡의 방법은 여러 가지이고 저마다의 특징을 지니는데, 명상법과도 연관성이 있다.


단전호흡의 지식

단전호흡의 특징 중의 하나는 호흡과 호흡 사이의 지식(止息)이라는 자연스러운 멈춤이다. 이 지식(止息)은 '숨쉬기를 잠시 멈춘다'는 뜻으로, 숨을 들이쉬고 멈추고, 다시 숨을 내쉬고 멈춘다는 우리말 표현 속에도 스며 있다. 이런 자연스러운 멈춤은 하나의 동작에서 다른 동작으로 넘어가기 위한 자연스러운 물리적 현상으로, 마치 공을 위로 높이 던지면 공이 가장 높이 오른 최고 지점에 도달했을 때 잠시 멈추고 방향을 바꾸어 내려오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자연적인 호흡과 호흡 사이의 멈춤은 근래에 들어 의식적인 멈춤으로 강조되어 여러 호흡법을 통하여 스트레스가 많은 현대인들에게는 물론 출산하는 산모들 에게까지 다양한 방식을 통해 소개되고 있다.

또 다른 특징은 다른 호흡법과는 달리 들숨에서 시작하는, 들숨 날숨의 호흡 형태를 유지한다. 이와 같은 들숨 날숨의 호흡 순서에 대해 선도법의 청산거사는 중국의 호흡은 내어 쉬고 들이쉬는 호흡의 순서임에 반해, 단전호흡의 호흡은 들이쉬고 내어 쉬는 들숨 날숨의 순서이며, 이는 '들락날락'이나 '들숙날숙'의 어휘와 마찬가지로 한국어 고유의 순서임을 설명한다. 


단전호흡의 신비

자연계의 모든 물체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무게 중심이 있다고 한다. 따라서 사람의 몸에도 특정한 무게 중심이 존재한다. 단전의 위치가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은 아니지만, 의학계의 자료에 따르면 인체의 여러 기관 중 하복부가 가장 무겁다는 점을 고려할 때, 단전이 우리 몸의 무게 중심과 비슷한 위치에 있을 가능성도 생각해볼 수 있다.

또한 현세기 과학은 신비에 싸여 있던 세계를 드러내기도 한다. 거대한 우주의 태양계와 물체를 이루는 가장 작은 입자인 원자의 모형은 어마어마한 크기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인 구성이 놀랍게도 유사하다. 태양계에서는 지구를 비롯한 여러 항성들이 태양의 중력에 끌려 그 주위를 돌고, 원자 모형에서는 전자들이 원자핵의 주위를 빠른 속도로 돌며 감싸고 있다. 이는 우주 속의 물체들이 혼자 스스로 존재하기보다는, 어떠한 중심을 향하여 주위와 함께 존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몸속에서 일어나는 마음이나 생각도 생명의 힘이 있기에 존재할 수 있다. 마음이나 생각도 생명의 힘을 공급하는 근원점인 중심을 향하여 존재해야 한다고 할 수 있다. 만일 마음이나 생각이 제각기 따로 혼자 존재한다면, 자연의 원리를 벗어나게 되고, 그 결과로 마음의 불안 등을 초래할 수 있다.


단전호흡의 예 

단전운동은 걱정과 근심에 그리고 각종 스트레스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운동이다. 단전사상을 바탕으로 하는 단전의 힘은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유지하도록 도와준다. 단전에 힘을 모을 때 몸과 마음이 하나되고, 단전에 힘이 빠지면 마음이 흔들리게 된다. 

배꼽 3치 아래쪽 부분에 위치한다고 알려져 있는 단전은 몸의 중심에 위치한 코어(Core) 근육인 하복부 근육으로 둘려 싸여 있다. 하복부 근육은 아기가 모태에서 호흡 없이 삶의 힘과 영양을 공급받기 위해 힘차게 움직이던 근육이었지만 태어나서 호흡을 시작하면서 점차 경직되기 시작하여, 나이가 들을 수록 서서히 그 범위를 넓혀가며, 위쪽으로는 폐의 아래 쪽 부분까지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단전호흡은 들이 쉬고 (들숨, 멈춤), 내어 쉬는 (날숨, 멈춤) 행위를 한 단위로 진행한다. 들숨, 멈춤, 날숨, 멈춤은 호흡에 부담이 가지 않도록 주의하며, 각각 동일한 시간 간격을 주어 10회 정도 반복한다. 이러한 단전호흡은 몸의 기운을 강화시키는 효과를 가질 뿐만 아니라, 호흡과 함께 단전 부위에서 일어나는 힘의 변화에 자각을 집중하여 현재에 머무르며 호흡에만 전념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단전운동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해야 하는 그룹 운동이라고 하기 보다는 개인 운동이다. 단전운동의 기본방식을 토대로 자신에게 맞는 맞춤형을 구성하여 꾸준히 실행하는 것이 중요하다. 단전운동은 본인이 편리한 시간에 편리한 장소에서 언제든지 실행할 수 있으며, 이와 같은 꾸준한 노력은 단전운동을 생활화하게 한다. 



초월명상

'자아'가 '나'를 의미한다면, 자아는 '나'를 구성하는 마음의 본질이기도 한다. 마음이 '나'의 몸 속 어디에 있는지, 어떤 모양인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태어나서 살아가는 동안에 내내 마음의 영향을 받고 살게 된다. 이러한 마음을 우리는 경우에 따라 하아트(heart)나 구름 또는 둥그런 원의 모양으로 표시하기도 한다. 

마음을 둥그런 원의 모양으로 이해한다면, 원 속에는 텅 비어서 아무것도 없고 테두리 조차도 없는 한없이 큰 둥그런 원의 모양이 아닐까 싶다. 이러한 마음 속에 생각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테두리가 생기고 크기가 줄어들며 온갖 생각, 기억, 걱정, 번뇌가 원 속에 쌓이면서 비었던 마음을 고통의 색, 슬픔의 색, 기쁨의 색 등으로 물들게 된다.

사람이 살면서 생각을 하면서 마음에 경계가 세워지고 테두리가 생기게 된다. 마음의 테두리가 필연이라면, 우리의 마음을 병들게 하는 생각, 걱정, 번뇌 등을 테두리 밖으로 내보낼 때 우리의 마음이 편안해질 수 있다. 


초월적 자아

15~16세기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일어난 문예부흥은 르네상스(Renaissance)로 불린다. 르네상스는 새로 태어난다는 의미를 가지며, 인간이 ‘신’ 중심의 중세 문화에서 벗어나 ‘자아’에 눈을 뜨고 이를 발견하려는 문화 운동으로, 문학, 건축, 조각, 예술, 음악 등을 통해 근대 문화의 기초를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은 몸을 구성하는 물질적인 요소와 영혼, 생각, 정신 등의 비물질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물질적인 면에서 볼 때, 그리스의 철학자 아낙사고라스(Anaxagoras)는 물체의 구성 본질을 원자라고 이름 하였다. 이에 반해서, 비물질의 본질을 '자아 (the self)'로 보는 견해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유명한 말이다. 이 말은 생각이 없으면 내가 존재하지만, 나를 의식하지 못하는 상태에 있을 수 있다는 의미이다.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는 주체로서의 '나 자신'을 자아(自我)라고 한다. 어린아이가 자라서 어른이 되더라도, 성인이 된 어른과 어린아이는 시간이 다를 뿐 동일한 ‘나’이다. 마찬가지로, 나이가 들어 기억을 상실하더라도 기억을 상실한 사람과 기억을 상실하기 전의 사람은 동일한 ‘나’이다. 즉, ‘나’라는 자아에 시간이 지나면서 생각의 레이어가 나무의 나이테처럼 층층이 입혀져 있을 뿐, ‘나’의 본질에는 변함이 없다. 이를 반대로 본다면, 자아에 입혀져 있는 생각을 하나씩 벗겨낼 때 ‘나’의 본질에는 변함이 없으며, 최종적으로 마지막에 남는 것이 ‘자아’라고 할 수 있다. 즉, ‘자아’를 찾기 위해서는 입혀져 있는 생각을 모두 버려야 한다.

이는 마치 양파 껍질을 벗기는 요리 작업에 비유할 수 있다. 둥근 양파의 껍질을 겉에서부터 하나씩 벗겨낼 때, 매운 성분이 눈과 코를 자극해 콧물과 눈물을 흘리게 하지만 계속하다 보면 결국 양파 껍질을 모두 벗길 수 있다.
 생각의 껍질은 '자아'를 흐리게 만든다. 자아가 흐려지면 마음도 흐려지게 된다. 어찌 보면 생각은 '자아'를 흐리게 하는 사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고, 걱정과 근심이 만들어내는 생각의 껍질을 모두 벗겨내기 위해서는 마음의 수양이 필요하다.
 흥미로운 사실은, 모든 생각의 껍질을 벗겨내고 마지막으로 남는 비물질적 요소의 본질인 '자아'는 도교에서 말하는 '무(無)'의 상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우주 만물을 담을 수 있는 아무것도 없는 '무(無)'의 상태는 요한복음서 1장 1절에 나오는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는 말씀의 깊이를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을 줄 수 있다. 이러한 이해는 종교적 해석이 아니라 과학적 사고를 토대로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 미시세계에 관한 현대 과학은 오랫동안 '파동'이라고 생각해 온 빛의 본질을 '입자'와 '파동'의 양면성으로 확대 해석하고 입증하고 있으며, 물질의 최소 구성 단위로 알려졌던 '원자'를 더 세분화해 소립자와 소립자 간 상호작용하는 힘을 물질의 기본 단위로 확대하여 밝힘으로써 우리의 사고 범위를 넓히고 있다.


이름을 통해서 보는 자아의 정체성

정체성은 영어로 identity라고 한다. 정체성의 문제는 자아(自我)의 발견에 따라 현대인에게 중요한 과제로 대두되고 있다. '내가 누구인가?'에 이어지는 질문은 '내 이름이 무엇인가?'이다. 이에 대해 우리의 선조들은 당신의 이름을 ‘나다’로 표현하였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라는 말이 있다. 우리 조상들은 이름 속에 자신의 삶이 담겨 있다고 생각하여 이름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자손들의 이름을 지을 때는 집안의 가장 연장자가 그 책임을 맡았다. 또한, 조상들은 이름 외에도 자신을 칭할 때 호(號)를 사용하였고, 자손들에게는 자신을 ‘나다’라고 표현하였다.

이러한 이름에 대한 문화는 우리만의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느님의 이름을 너무 거룩하게 여겨 직접 부르지 않고, 대신 ‘엘’, ‘엘로힘’, ‘아도나이’ 등의 이름을 사용하였다. 모세는 하느님께서 자신을 계시할 때 '나는 있는 나다'라고 하신 하느님의 이름을 받았다. 이는 출애굽기 3장 14절에 기록되어 있다.

우리는 이러한 문화의 영향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라는 질문은 처음 만나는 사람과 인사를 나누며 자연스럽게 주고받는 말이다. 간단하고 쉬운 질문임에도 불구하고, 바로 대답이 나오지 않는 것을 보면 나는 확실히 옛 세대 사람인 것 같다. 사실 우리 이름의 구조는 매우 단순하다. ‘성(姓)’이 먼저 나오고, 그다음에 돌림자와 부르는 이름이 따른다. 결국, 세 글자 이름의 경우, 나의 자율적인 이름은 그중 한 글자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이름이 규격화되면서 윗사람의 이름을 직접 부르기에는 다소 불편함이 생기고, 족보를 따지는 사람들은 이름을 보고 그 사람의 배경이나 내력을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신분화된 이름에 대해, 지혜로운 우리의 선조들은 상대방이 자신의 이름을 쉽게 부를 수 있도록 ‘호(號)’나 직함 등을 사용하였다. 또한, 예술과 글을 사랑하는 이들은 예명이나 필명을 가지기도 하여, 이름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자신을 표현하고자 하였다.

이름은 태어나면서 부모님이나 가족에 의해 주어지고, 직함은 세월이 흐르면서 직업이나 역할에 따라 얻었다가 사라지곤 한다. 반면, ‘호(號)’는 본인이 선택할 수 있으며, 일종의 삶의 동반자로서 평생 함께한다. 옛 세대 사람들이 ‘호’를 지니며 멋스럽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언젠가 나만의 ‘호’를 가질 수 있을까 생각해 보게 된다.

 

기억을 통해서 보는 자아의 현재성

생각은 과거의 기억을 현재로 불러오기도 한다. 어릴 적에 들었던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는 여전히 우리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설화이다. 우리의 마음속에는 이처럼 오래된 설화뿐만 아니라, 어릴 때 부르던 동요, 부모님과의 기억들도 자리하고 있다. 특히 부모님과의 아름다운 기억들은 마치 부모님의 영혼이 내 마음속에 살아 있는 듯한 따뜻한 느낌을 준다.

한평생을 사시고 세상을 떠나신 부모님들을 우리는 '돌아가셨다'라고 표현한다. 조상의 혼을 중요시하는 시베리아 샤머니즘에서는 이 표현이 영혼이 처음 왔던 곳으로 돌아갔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처음 온 곳으로 돌아가신 부모님의 영혼은 ‘나다’라는 자아의 이름을 지니고, 여전히 우리의 마음속에 살아 숨 쉬고 있다.


요가 명상

인도의 정신수련법으로 알려진 요가(Yoga)의 역사는 기원전 우빠니샤드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요가는 산스크리트어(Sanskrit, 또는 범어(梵語)) 'yuj'를 근원으로 '결합하다' 또는 '연계하다'는 뜻으로, 고대 인도 힌두교의 수행 방법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요가는 몸과 마음을 수련하는 몸의 자세와 명상을 통하여 모든 잡념에서 벗어나서 오직 한가지 대상에만 정신을 집중하여 이르는 경지인 무아지경, 또는 삼매경(三昧, 산스크리트어: samdhi)의 의식상태에 도달하려는 목표를 지향하며, 이를 통하여 현실적인 고통과 윤회의 사슬에 묶여 있는 개인적 자아가 인간이 본래 지니고 있었던 브라흐만이라는 초월적 자아로 돌아가는 원리를 지니고 있다.


통찰명상

통찰명상은 매 순간의 느낌에 주의를 기울이고 모든 자극에 대해 판단함이 없이 관찰하거나 의식하는 방식을 사용하는 명상으로 마음챙김 명상(Mindful mediation)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마음챙김 명상

마음챙김(Mindfulness) 명상은 미국 MIT 대학 교수, 존 카밧진(Jon Kabat-Zinn)이 불교의 명상법을 사용하여 개발한 스트레스 치유요법으로, 1979년에 마음챙김 명상 스트레스 완화 프로그램 (MBSR: Mindfulness-Based Stress Reduction program)으로 소개되었다. '마음 챙김'의 단어는 불교 교리 중 팔정도(八正道)의 '정념(正念)'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근래에 들어, 시갈(Zindel Segal), 윌리암스(Mark Williams), 티즈데일(John Teasdale) 등이 카밧진의 MBSR 이론을 사용하여 마음챙김 명상 인지치료 (MBCT: Mindfulness-Based Cognitive Therapy)의 기법을 개발하여 마음의 치유를 위한 방식으로 보급하고 있으며, 이 방식은 여러 나라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다.

명상과 복식호흡 또는 요가와 복식호흡의 접목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마음 챙김 명상 인지치료 (MBCT) 기법은 불안한 마음을 갖게 하는 오만가지 생각, 쓸데없이 갖게 되는 예기불안들을 없애 주며, 숙면을 취하는데 도움을 준다. 이러한 효과가 의학적으로 확인되면서 MBCT는 새로이 각광을 받고 있으며, 불면증, 불안장애, 공항장애, 우울증 등의 치료영역까지 확대되고 있다.

MBCT의 기본 원리는 호흡과 명상을 통하여 '현재'에 집중하는 것이다. MBCT의 '현재'는 문법 시제인 과거, 현재, 미래에서의 현재와는 다르다. MBCT의 '현재'에는 과거도 미래도 현재도 없으며, 눈 한번 깜박일 때 이미 사라져 버리는, 바로 지금 이 찰나의 순간을 지칭한다. '현재'는 볼 수도, 알 수도, 느낄 수조차 없는 지극히 짧은 순간이다. 이러한 '현재'를 마치 거울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듯이 마음의 눈을 통하여 바로 볼 때 우리는 '현재'에 머물고 '현재'를 깨치게 된다. 이는 마치 마음을 직관(直觀)하고 정신을 통일하여 마음의 본바탕인 불성을 발견하여 부처를 이루는 견성성불 (見性成佛)의 자세이기도 한다.


호흡을 느끼는 명상

우리의 몸에는 몸의 균형을 맞추어 주는 역할을 하는 자율신경계의 교감 신경과 부교감 신경이 작용한다. 교감 신경은 동기부여, 집중, 추진 등의 활동을 위한 역할을 하며, 부교감 신경은 휴식, 완화, 회복 등의 안정을 위한 역할을 담당하여, 시시각각 변하며 움직이는 우리 몸의 상태를 편안하게 유지시켜 준다고 한다.

생활을 하면서 우리의 머리 속에는 오만가지 생각이 떠다닌다. 때때로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생각이 생각의 꼬리를 물고, 자신의 마음을 어렵게 하는 경우를 경험하기도 한다. 심지어는 이러한 생각이 맥박, 혈압, 소화 등에 까지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느낄 때도 있다. 이러한 상태가 지나치거나 장기간 지속되는 경우, 자율신경계의 균형이 깨어지고, 특히 우리 의지와 관계없이 작동하는 부교감신경의 이상반응으로 인해 불안장애, 우울증 등의 증세로 나타나게 된다.

깨어진 자율신경계의 균형을 회복하기 위해서 명상, 타이치(Tai Chi), 요가 등의 방법이 이용되고 있다. 현대의학에서는 MBCT 마음 챙김 명상 등에서 행하는 호흡이 부교감 신경의 안정을 위한 역할을 증가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것으로 확인하고 있다. MBCT는 존재하지 않는 불안한 생각에 빠져 불안하다고 느끼는 증세인 불안장애로부터 벗어나도록 도와 주기위해 호흡을 통하여 현재 즉 아무 불안한 일이 없는 지금에 생각을 머물게 도와준다. 

우리는 가끔 잠시 일상을 잊고 나만의 시간을 가져 볼 필요가 있다. 이때 자신의 호흡에 집중해서 들어오는 호흡과 나가는 호흡을 의식하면서 신체 각부위에 느껴지는 느낌을 자각하다 보면 생각이 지금에 머무르며 심장 박동수는 느려지고 마음이 편안해 진다. 이러한 호흡의 원리를 마음 치료방식에 접목한 MBCT 마음 챙김 명상은 치료목적으로 개발됐지만, 일상생활속에 부분적으로 잘 활용하면 스트레스나 불면증 해소 또는 심신안정을 얻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스트레스를 이기는 걷기명상

알아차림 명상법의 걷기명상은 의식적 걷기의 효과를 이용한다. 걸으면서 주의를 이동시키며 자신을 알아차리게 한다. 예를 들어, 주의를 천천히 발뒤꿈치까지 이동시키며, 바닥에 닿아 있는 딱딱하거나 부드러운 발바닥의 접촉의 느낌, 떠는 싱그러운 공기, 따스한 햇볕, 흔들리는 나뭇잎, 새들의 지저귐, 피어나는 꽃 봉우리 등을 느끼면서 자연과 하나되는 자신을 알아차리는 명상이다.

 

바디스캔(body scan) 명상의 예

호흡을 하면서 몸 여러 부분의 물리적인 반응에 집중하는 방식을 취한다. 그럼으로써 현재 순간에 대한 인지도를 높이고 스트레스와 불안을 해소하는 명상이다.

1.    편안한 자세로 자리에 앉아서

2.    눈을 지그시 감고 

3.    마음을 호흡에 집중하여, 자연스럽게 들이쉬고, 내어 쉬고, 들이쉬고 

4.    천천히 공기가 허파로 들어오면서 확장되고, 숨을 내어 쉬면서 줄어드는 느낌을 알아차리고

5.    숨을 들이 쉴 때 복부 부분이 부풀어 올라가고, 내어 쉴 때 내려가는 느낌을 인지하고

6.    이와 같은 방식으로 몸의 다른 부분, 곧 등, 허리, 허벅다리, 무릎, 종아리, 발목, 발, 발가락으로 주의를 집중해 가며

7.    집중이 산만해짐을 알아 차릴 때는 자연스럽게 의식을 집중하려고 했던 곳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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