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여섯 번째 해부 : 그 사람

나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by 이가은


붉은 실이 정말 있다면 난 아마 이 사람과 엮여있지 않을까. 전생이 있다면 그리고 다음 생이 존재한다면 그때에도 이 사람과 엮인 붉은 실이 끊어지지 않기를 기도한다. 빨갛고 빨가안 실이 단단하고 끈끈해서 결국 만나게 되는 그런 인연이기를. 얽히고 얽혀 사랑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 엮이고 싶은 사람.

아주 가끔, 아니 사실은 거의 매일 그 사람의 향기를 맡고 싶다. 그 사람의 향기를 향수로 만들 수는 없으니, 내가 좋아하는 향수를 선물한 적이 있었다. "꼭 나 만날 때 그 향수 뿌리고 와!" 몇 번을 되새기며 읊은 탓에 그는 본인의 취향을 잊은 채 내가 준 향수만 뿌려댔다. 그가 남기고 간 진한 향기가 집안 곳곳에 스며들면 그가 떠난 자리에 남은 나의 공허함을 쉽게 잊을 수 있었다. 그러나 머지않아 온몸의 피가 느리게 돌았다. 며칠째 물을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사람처럼 기운이 전혀 없었다. 바싹 마른 입술 틈으로 겨우 꺼낸 말.

'보고 싶다.'

나는 쉽게 화를 내고 그에게 온갖 투정을 부려댔다. 사회에서는 절대 보여주지 못하는 모습조차 그는 알고 있었다. 나의 모든 것, 어쩌면 나의 세포가 어떻게 생겼는지 혹은 내 숨에서 불어오는 미미한 감정까지 그는 알았을 테다. 그래서 나의 진짜 모습을 유일하게 보여줄 수 있었다. 아주 가끔 '못됐어'라고 말하면서도 그는 나를 숨이 막히도록 안아주었다. 그는 나의 못된 감정까지 사랑해 버린 걸까. 오히려 그가 나의 진짜 모습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즐기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나와 그가 머무는 공간은 마치 깊은 바닷속 같았다. 그를 바라보는 시간 속에는 어느 것도 들리지 않았고, 무척이나 고요하고 아늑했다. 깊은 바닷속에서 우리는 서로의 숨을 주고받으며 잠수의 한계를 지워갔다.

나는 습한 여름을 좋아한다. 그가 무척이나 싫어하는 것 중 하나다. 그러나 그 사람을 떠올리면 생각나는 계절이 습하디 습한 여름뿐이다. 찝찝하고 끈적이는 공기에 푹 안겨있는 기분. 더운 공기에 숨이 막혀 갑갑한 기분. 그러다 시원한 소나기가 내리면 고여있던 감정의 결들이 빗자락에 씻겨나가는 기분. 샤워를 하고 나온 지 1분이 채 되지 않아 다시 진득하게 들러붙는 살들. 그는 나에게 이런 기분을 느끼게 해 준다. 불쾌지수가 치솟는 습한 여름의 공기에 그의 향기가 가득 채워지면 나는 그 여름을 끝내고 싶지 않아 나를 산산조각 낼지도 모른다. 여름의 공기에 어떻게든 스며들기 위해 나를 원자로 만들지도.

우리는 11년째 함께 사랑을 공부하고 있다. 서로가 선생님이 되어 각자가 가진 사랑을 알려준다. 누구보다 성숙한 모습으로 사랑을 마주하다가도 금세 어린아이가 되어 투정을 부리곤 한다. 그 사람 앞에서는 나도 나를 모를 만큼 성격의 자유성이 높아진다. 그럼에도 그 사람은 그게 매력이라며 다시 숨이 막힐 만큼 꼭 안아준다. 허공에 멍하니 생각에 잠식당할 때에도 그 사람이 일렁인다. 그 사람을 생각하다가 눈물이 흘러넘치고 말아 민망한 듯 고개를 떨군다. 슬픔보다는 감정이 흘러넘쳐흐르는 것 같다. 사랑의 크기를 담아낼 수 있는 것이 있기는 한 걸까. 이 사랑은 나를 지탱해 준다. 그 사람은 내가 무엇이든 할 수 있게 해 준다. 짓궂은 불면증을 잠재워준다.

목소리, 향기, 표정, 성격 그리고 단점까지도 사랑 그 이상을 한다. 그 사람은 나의 지구다. 나의 집이며 나의 공간이다.
그 사람이 있는 그 순간, 나는 드디어 완성된다. 그 사람의 우주가 되어주고 싶다. 그 사람의 집이, 공간이 되어주고 싶다.

그렇게 한 여름 새벽의 습하디 습한 공기처럼 우리의 사랑에 잠식당해 빠져 죽어도 좋을 만큼.

그를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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