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차 교사가 된 나를 살펴본다. 길지 않는 교직생활이지만 그래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 처음 기간제로 학교에 들어갔을 때와 비교해보면 목소리는 조금 더 단호해졌다. 즐거운 연애로 몸무게는 다시 임용고시가 끝났던 때로 돌아갔고 피부는 좀 좋아진 것 같다. 마음은 보다 단단해진 것 같은데 내게 충격을 줬던 기억들은 어제일처럼 생생하게 가지고 있다. 요즘 충격을 받았을 때를 생각하면 나는 손이 떨린다. 부들부들, 손이 떨린다는 말이 무엇인지를 나는 올해 알게 되었다.
과거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사람에게 말 한 마디 제대로 하지 못했던 것과 달리 요즘은 할 말은 한다. 가끔은 소리를 지르기도 한다. 교직은 착하고 여린 사람에게 더 가혹한 환경이다. 불편한 말을 하고, 싫은 티를 내고, 가시를 주욱 드러내고 있으면 잘 건드리지 않는다.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하지 않으려는 배려와 순진함이 스스로만을 더 괴롭혔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닿고 나는 좀 나쁜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 같다. 철밥통의 세계는 내가 보냈던 초,중,고,대 와는 다른 규칙이 적용되는 것 같다.
교직을 하며 나를 괴롭혔던 몇 가지 기억들을 떠올려볼까 한다. 오늘 말하고 싶은 것은 한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이다. 아이의 이름은 영수라 하겠다. 나는 6학년의 영수를 데리고 한 해를 보냈다. 영수는 5학년에 전학을 온 학생이었는데 특유의 자의식 강한 성격과 솔직하지 못함으로 친구를 사귀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영수는 담임교사인 나에게는 깍듯한 태도를 보였는데 친구들에게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였다. 여자아이들의 얼굴을 빻았다고 했고, 화장품 파우치를 쓰레기통에 던지고, 친구들을 무시하는 말을 일삼았다. 당연히 그렇게 살려면 친구가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혼자 잘 지내면 되는데 또 외로워했다. 영수의 친구를 사귀는 방식은 완전히 잘 못 되어 있었다.
‘대체 어디서 이렇게 행동하면 친구를 사귄다고 배웠니?’
영수에게 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친구들에게서 항의가 빗발치는데 영수는 여전했다. 방과후에 남기고 쉬는 시간에 부르고 상담을 하고, 영수가 잘 못한 아이들에게 데리고 다니며 같이 사과를 하고, 다시 상담을 하고… 영수는 변하지 않았다. 나는 영수의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생각하면 완전히 잘못된 선택이었다. 아이가 도덕적으로 이상할 경우, 이는 분명 어디로부터는 내려온 것이다. 고리타분한 말이고 나는 이런 말을 싫어하지만 이번 경우에 있어서는 맞았다.
영수의 어머니는 부정하고, 상대 아이의 잘 못을 이야기하고, 자신의 사정만을 생각한 시도 때도 없는 전화로 나를 괴롭혔다. 작년 나는 몇 가지 일들로 괴로워하고 있었다. 6학년 남자아이들의 남성호르몬은 솟구쳐서 눈에 뵈는 것 없는 상태로 만들었고 그런 아이들 앞에서 경험없고 어리숙했던 나는 산산히도 부셔졌다. 조퇴를 하고 정신과를 다니기 시작했다. 정신과 진료를 대기하는데 영수엄마의 전화가 왔다. 그때 시간은 5시 무렵. 나의 근무시간이 끝난 시간이었지만 나는 한숨을 쉬면서돋 전화를 받았다. 그것이 일 하는 학부모에 대한 선생의 미덕이라고 생각했고 그러한 태도가 결과적으로는 나를 지켜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나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것은 나 뿐이다. 지금 그 일들을 우직하게 버텨내려고만 했던 스스로를 후회한다. 어떤 일은, 그냥 던져버리고 나 자신을 우선적으로 생각해야 하는 것이었다.
영수 어머니와의 전화는 항상 한결같았다. 우리 아이가 잘 못한 부분이 있다, 하지만 상대 아이도 정상이 아니다, 우리 아이가 신체적인 폭력을 썼다면 그 아이는 우리 아이에게 정신적으로 엄청난 고통을 줬다, 보이지 않는 상처가 얼마나 괴로운 지를 외치는 어머니에게 나는 영수 역시 다른 친구에게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오히려 더 크게 준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저 안타까운 목소리로 영수의 상담 치료를 권할 뿐이었다.(지금 생각해보니 이 역시 상황을 인정하지 않는 영수 어머니를 향한 카운터 펀치 였을지도 모르겠다.)
우리반에는 중국인 어머니와 한국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친구가 있었다. 여자아이었고 중국에서 쭉 성장하다 초등학교 4학년이 되서야 한국에 넘어온 중도입국학생이었다. 이 아이는 마음이 너무나 여리고 착한 그런 친구였는데 어느날 이 친구가 나에게 와서 말했다.
“영수가 저를 괴롭혔어요. 선생님.”
영수가 어떻게 했는데?
“영수가 저한테 샤프를 빌려갔는데, 샤프가 잘 안나오니까 제 앞에서 ‘이상하다? 샤프가 왜 안나오지? 중국산이라 그런가?’ 하고 말했어요.“
아이는 나에게 울면서 말을 했다. 이 당시 익숙하지 않은 한국말과 문화 속에서 위축된 아이에게 영수는 너무 잔인했다. 아이들은 잔인하다. 교육으로 그 본성을 감추고 있을 뿐 사실 타인에게 너무나 잔인한 동물이다. 어린 영수의 눈에도 우리 반에 친구를 많이 사귀지 못하고 위축되있고 항상 잘 웃는 이 아이가 건드리기에 좋아보였던 것이다. 영수는 나의 말에 친구에게 쉽게 사과를 했지만 그 기억이 이 아이의 머릿속에서 쉽게 지워질까. 죄가 쌓이는 나날들이었다.
영수는 친구들과 말로 싸우고 몸으로 싸우고 이제는 내 앞에서 대놓고 치고박기까지 했다. 6학년을 맡고 울고싶은 나날이 늘었다. 지금도 전국에서 사춘기에 막 접어든 6학년 아이들을 맡은 선생님들께 존경을 표한다. 나는 영수를 타이르고 매 쉬는 시간이면 학년실로 데려가 상담을 하고 소리를 지르다가 간이 부었다. 영수 어머니와 전화할 일이 생기면 전학을 권유하기도 했다. 우리반 아이들 모두와 영수가 다툰 이후였다.
영수의 만행은 언제가 되서야 잦아들었는가. 그것은 신나게 건드리고 다니던 우리반 여자아이들 중 한 명의 학부모가 영수를 학교폭력으로 신고하고 나서였다. 처음 자신의 아들이 학폭으로 신고당했음을 안 영수의 어머니는 나에게 학폭 선생님께 가서 영수를 변호해달라 요구하다가 나중에 가서는 이제껏 영수와 트러블이 있었던 모든 아이들을 학폭으로 신고해달라고 했다.
나는 머리를 쥐어싸매고 교무실로 갔는데 교감 선생님은 답이 나오지 않음을 진즉에 파악한 듯 다 받아주라고 했다. 그거 안 받아주면 학교에서 학폭 은폐한다고 말하고 다닌다며 학폭으로 접수하라고. 다만 졸업이 얼마 남지않은 지금, 쌍방 가해로 나온 사건이 1건만 더 생기면 그것이 생기부에 기록된다는 사실은 알고 있으라고 학부모에 전하라고 했다. 과연 연륜이 그냥 있는 법은 아닌 듯 했다.
영수 어머니는 분노하다가 나의 조심스러운 듯 걱정하는 말에 [ 잘 못 되면 이것이 영수 생기부에 기록을 해야 해서요~.] 마법같이 조용해졌고 나는 그나마 편안한 2학기를 보낼 수 있었다. 사실 거짓말이다. 영수보다 더한 빌런들도 많았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일 년이었지만 영수가 한 뼘이라도 넓은 마음으로 좋은 친구를 많이 사귀었길 바란다. 우리 학교 아이들이 별로 가지 않은 학교로 진학한 영수가 그래도 밝은 얼굴로 스승의 날에 찾아온 걸 보면 마음이 조금이라도 편해졌을까? 한 해동안 많은 친구들과 치고박고 나에게 많은 잔소리를 들으며 영수의 마음도 물론 행복하지 않았을 것이다. 앞으로 성장하며 좋은 친구를 사귀고 남에게도 좋은 친구가 되어주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