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망하기만 해 봐라
같은 음식을 먹고, 비슷한 운동량을 가져도 살이 더 찌는 사람이라면, 현대 사회의 외모 평가에서는 불리하다. 하지만 우리는 외모를 평가하는 사회적 존재이기 이전에, 호흡과 대사를 통해 생명을 유지하는 생명체이다. 그리고 생명체의 기준에서 볼 때 살이 잘 찐다는 것은 나쁜 것만은 아닐 수 있다.
인류가 기근에서 탈출한 것은 생각보다 오래되지 않았다. 기계식 농업, 공장식 축산업 도입이 이뤄지기 전까지 인간은 변덕스러운 기후와 한정된 계절, 지역의 여건으로 끊임없이 굶주리며 살아왔다. 사냥을 하던 시절에는 4~5일에 한 마리 잡아서 온 가족이 나눠먹는 게 전부였을 것이고, 우리나라의 전래동화나 문학 작품에서는 보릿고개에 풀뿌리를 캐 먹었다는 것을 심심찮게 확인할 수 있다.
대식가들, 화면에서 만날 수 있는 많이 먹는 사람들은 어린 시절 배가 고파 물로 배를 채웠다고 하기도 한다. 그렇게 배고픈 사람들이 만약 기근의 시대에 살았다면 어땠을까. 주변에 과민성 대장 증후군을 가진 사람이나, 혹은 정말 예민하여 작은 스트레스에도 소화를 못하고 설사를 하거나 토하는 사람들의 경우는 어떨까. 오랜만에 먹을만한 풀뿌리를 찾아서 먹었는데, 자신의 이런 기구한 처지가 너무 서글퍼서 울다가 먹은걸 다 토해냈다면, 옆 사람에게 날아오는 귓싸대기는 물론이거니와, 오래가지 않아 굶어 죽을 확률이 매우 높을 것이다.
그에 비해 나 같은 뚱땡이는 존엄성을 지키기에 수월하다. 남들이 10의 음식을 먹고 5를 배출할 때, 나는 1만 배출할 수도 있지 않은가. 놀라운 소화력과 흡수율을 가진 나 같은 사람은, 에너지원이 풍부한 지금에야 각종 성인병의 위협에 시달리고 있지만, 기근의 시대에는 아주 훌륭한 선비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세상이 망한 아포칼립스 세계관의 영화를 보면, 언제나 문제 되는 것은 식량인데, 아마 나는 그런 상황에서 동료에게 식량을 양보하며 조금만 더 버티자고 다독일 수 있는 훌륭한 동료가 되지 않을까.
그렇다. 현시대의 뚱땡이는 과거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이다. 부와 권력 등 각종 사회적인 수단으로 살아남은 날씬이들도 공존함이 조금 문제 이긴 하지만, 우리는 살아남은 사람이 것이다. 위기에 적응하기 수월하도록 에너지 소비를 최소화할 수 있고, 잉여 칼로리를 저장함으로서 언제가 될지 모르는 기근에 대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훌륭한 생명체이다.
위기에 적응하기 수월하다는 것은, 다른 개체보다 스트레스에 강하다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 같은 뚱땡이의 장은 매우 튼튼하여, 기분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데에 유리한 환경을 갖추고 있다. 이제는 많이 알려진 사실이지만, 장은 광범위하게 중추신경계와 연결되어 있고, 수많은 교감/부교감신경의 작용에 관여하며, 우리 몸의 전체 세로토닌의 90% 이상이 장에서 나온다. 영어로 직감이라는 gut feeling의 gut은 내장이라는 뜻이다. 그만큼 튼튼한 장은 우리가 정신적으로 얼마나 큰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지를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되지도 않는 장점들을 나열하는 것이 뚱땡이를 위로하고 나를 방어하고자 하는 말은 아니다. 어떤 생명이든, 절대적인 기준으로 우열을 가릴 수 없고, 개별 개체는 모두 그 나름의 이유와 장단점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내 아내는 소위 말하는 많이 먹어도 쉽게 군살이 붙지 않는 타입이지만, 각종 스트레스에는 굉장히 취약하고, 감정의 기복이 있는 편이며, 더위와 추위에 모두 약하다. 나는 뚱땡이지만, 감정의 기복이 거의 없으며, 겉으로는 전혀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하고, 실제로도 스트레스가 없는 편이며, 덥거나 추운 것을 인식하며 살지 않을 정도로 체온 유지가 잘 된다. 몸 상태가 안정적이다 보니, 극한 환경에서도 정신이 먼저 꺾이지 않는다.
여러분 스스로를 돌아본다면, 신체와 정신의 장단점을 발견하실 수 있을 것이다. 정신적 특성, 개인의 성격이라고 생각했던 부분들은 의외로 대부분 몸 상태, 건강과 연관이 되어있고, 같은 원리로 개인의 성격이 다른 것처럼 체형이 다른 것도 당연한 것이라는 이야기의 도출도 가능하다. 사람의 특정 성격이 모든 상황에 적합한 것은 아닌 것처럼, 체형 또한 모든 상황에 적합한 하나의 형태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특정 MBTI 유형이 다른 유형에 비해 자격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이 아니듯, 뚱뚱한 체형이 날씬한 체형에게 자격지심을 가져야 할 필요도 없다.
세상이 망했을 때, 나는 꽤 잘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망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망하지 않을 것이다. 살아야 하는 것은 먹을 음식이 풍족한 현실이고, 나를 위협하는 것은 좀비나 외계인, 추위가 아닌 맛있는 음식들이다. 체형의 개성에 대한 존중을 얻는 데 성공했다면, 이 무섭게 맛있는 위협들을 이겨내기 위한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아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