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급한 마음을 멀리하는 연습
오들오들 떨던 긴긴 겨울이
이제야 조금 지나간 듯하다.
날이 따수워지니
오후에 동네를 산책할 맛도 난다.
불과 반년 전만 해도
계절의 변화는 나와 조금
무관한 일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봄꽃이 살랑여도,
쨍쨍한 햇살로 공기가 일렁여도,
낙엽이 흩날려도,
소복한 눈이 쌓여가도
나는 늘 안전한 실내의 그 자리,
회사의 컴퓨터 앞에 앉아있었다.
출근길과 점심시간,
그리고 퇴근길에야 겨우
자연이 제 속도대로
흘러가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나는 제자리인 것만 같은데
어찌나 계절은
금세 표정을 바꾸는지.
특히 화창하고 눈부신 하늘을 바라볼 때면
"못 먹는 감 찔러나보고 싶네, 비나 와라." 하며
괜한 심술을 부리기도 하는 나였다.
그만큼 계절이 내뿜는 경이를
조금만 더, 정말 조금만 더
가까이 두고 싶었다.
-
그런데 어쩌다 보니 그런 나도,
오롯이 계절을 얻는 순간이 왔다.
더이상 매일 가야할 직장이 없다는 것에
차츰 익숙해지고 있던 시간.
유독 움츠러드는 겨울이었다.
눈이 내리면
눈 내리는 숲을 바라보기 위해
부지런히 뒷산에 올랐다.
언제 뽀얀 빛깔이었냐는 듯
도로 위에 질퍽해진 눈을 밟으며
애써 옮기곤 했던 발걸음을 기억한다.
그러니 눈이 생생히 내리고 있는 순간의 숲.
눈 숲의 풍경 속에 내가 일부 녹아든다는 게
참 낯설고 신기하게 느껴졌다.
또한 한파가 몰려오는 날엔
마치 강 건너 불구경 마냥
집에서 담요를 두르고는
창 밖의 맑은 하늘을 구경했다.
오락가락 변덕을 부리는 봄도 거뜬해졌다.
왜 꼭 쉴 수 있는 주말에는
아쉬운 공기와 햇살인 걸까 생각하며
서글픈 찰나의 봄이라고 생각하던 때도 있었지만,
이제는 이때다 싶으면 언제든 나가서
햇살을 만끽했다.
더 이상 나는 서울 한복판
높은 빌딩 위에 자리 잡은
책상 앞이 아니었다.
이런 계절과의 감응을 늘 꿈꿔왔다.
여기에는
안정적인 직장과 월급이라는 울타리와 맞바꾼
달콤함이 서려있었다.
아니, 정정해야겠다.
그건 달콤 쌉싸름함에 가까웠다.
앞으로 한 십여 년 걸리려나.
나는 건축가의 길을 걷다가 공예가로 전향했고
직장인으로 살다가 개인사업자가 되었다.
이렇게 그리는 삶에서
손끝으로 만드는 삶으로 옮겨간다는 것.
소속되지 않고 온전히 스스로 책임진다는 것.
이 두 가지 모두 내가 처음 하는 일이다.
그리고 앞으로 최소 십여 년 동안
연습하고 또 연습해야 할 과제일 듯싶다.
그 십여 년이란 기준은 내가 했던 건축 일,
그러니까 지난 학부시절부터 직장생활까지의
총기간과 엇비슷하기도 하다.
그러나, 어쩌면 그 시간도 부족할지도 모른다.
혼란스럽기도 한 세상에서,
효율적이고 자동화된 기술은
점점 발전해가고 있는데
직접 손으로 만드는 일을 지향한다는 건
비효율로의 회귀를 뜻하기도 한다.
흔하지 않은 일이며
성공이 보장되지도 예측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러니 비단 쉬울 리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가는 줄 모르게 즐겁고,
의미를 찾을 수 있으며,
지속하고 싶은 일이다.
"지속하고 싶은 마음"
이건 내게 있어서 "지속하는 상태"보다 더 중요했다.
내가 어느순간
잃어버렸던 마음이기 때문일까.
요즘엔 부쩍,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과
이런 대화를 자주 주고받는다.
"지금 씨앗을 열심히 뿌리고 있지만
수확하는 데에는 예상보다 더
긴 시간이 필요할 수도 있어.
근데 옳은 방향으로 계속 시도한다면
분명 언젠가 진가가 드러날 거야.
만약 그 언젠가가
너무 먼 미래에 오는 바람에
우리의 생계가 버거워지면,
그때는 도시가 아닌
한적한 곳에서 살면서 하면 돼.
앞으로 십 년, 이십 년 흐른 후에
현재를 바라보면,
작은 점에 불과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잖아.
그런데도 불쑥불쑥
조급함이라는 손님이 찾아오면,
뜨신 물 한 컵 내어주고
다독이면서 돌려보내면 돼."
-
나의 매일매일은
스케치를 하고, 톱질하고, 다듬어 가는
누구도 알 수 없는 시간의 연속이다.
오직 나만이 나의 증인이자 관찰자라는 사실이
힘이 되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을 계속 움직이다 보면
마음을 어지럽히던 불안은 금세 자취를 감춘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묵묵히 하루하루 성실히 보내며,
내 손끝을 성장시키겠다는 의지가 들어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