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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뎌지기 전에, 잠시 멈췄다.

흔들리는 것에 시선을 빼앗긴 날

by 손스침

회사를 그만두고 꽤 시간이 흘렀다.

이따금씩 그 시절이 떠오른다.


책상 위엔 도면 뭉치가 수북했고,

마감 전날엔 식은 커피 잔과 야근 식대 영수증이 늘 함께였다.

모델링과 CG, 예쁘게 연출된 이미지들을 만드는 일은 분명 재미있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그 선들이 어디로 이어지는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손끝은 여전히 분주했지만, 마음은 자꾸 말라갔다.

선 하나를 그을 때마다, 내가 그 안에서 조금씩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디자인은 상사의 취향대로 정리되었고,

디테일을 고안할 시간은 늘 부족했다.

클라이언트의 관심은 결과의 속도에만 머물렀고,

내가 붙잡았던 고민들은 도면 어딘가에서 자주 사라지곤 했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건축을 좋아했고,

언젠가는 나만의 사무소를 만들겠다는 믿음도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 믿음조차 낡아져 갔다.

설계는 점점 무겁고 길게 느껴졌고,

나는 그 안에서 점점 흐릿해졌다.


그래서 멈췄다.


무언가를 하고 싶어서라기보다,

지금처럼은 더는 안 되겠다는 마음이 먼저였다.


퇴사 후엔 책도 읽고, 영화도 보고, 캠핑도 다녔다.

손에서 무언가를 내려놓고, 바라보는 법부터 다시 배웠다.

책을 읽고, 산책을 하고, 캠핑을 다니며

하루를 조용히 흘려보는 연습을 했다.


그러다 우연히, 철사로 작은 구조를 만들게 되었다.

형태라고 부르기엔 어설프고 작았지만,

그 조형이 아주 천천히 흔들리는 걸 바라보는데

이상하게 머릿속이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IMG_9131.JPG “어느 날, 빛과 함께 흔들리는 조형을 바라봤다. 바뀐 건 아주 작았지만, 그 작은 움직임이 나를 다시 시작하게 했다.”


그 순간, 무언가가 조용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건 조형이 아니라, 나였다.


그게 시작이었다.


처음엔 작은 조각들을 손에 쥐고,

형태를 정리하듯 금속을 갈고 다듬었다.

날카로운 모서리를 둥글게 만들고,

표면의 거친 결을 조용히 문지르며 감각을 익혀갔다.


형태는 불규칙했고, 균형은 늘 조금씩 어긋나 있었다.

그래서 매번, 위치를 바꾸고 무게를 가늠하며

조심스럽게 다시 조율했다.


그건 생각보다 건축과 닮아 있었다.

공간을 상상하고, 빛과 공기의 흐름을 구성하는 일.

다만 도면 안의 질서가 아니라, 손으로 직접 만지는 리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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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