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맘을 먹고 <투더마니>라는 헝가리어 학원에 등록을 했다. 나라에서 일부를 지원해주는 시스템이라 출석 일수를 만족하고, 기말평가 60점 이상이면 미리 지불한 수업료의 절반을 돌려주는 곳이다.
아침에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고 10시까지 학원에 가면 점심시간이 따로 없이 2시 반까지 수업이 진행되는데 안쓰던 머리를 써서 에너지 소모가 많은건지 간단한 간식거리를 준비해가지 않으면 견디기 힘들 정도로 배가 너무 고팠다.
클래스에는 함께 등록한 지인 몇 명과 헝가리 외 다른 유럽 국가에서 온 사람 몇 명, 아랍쪽에서 온 사람, 베트남에서 온 사람, 중국에서 온 사람 등 다양한 민족의 사람들이 함께 했다.
첫 날 배운 것은 a.b.c(아베체) 헝가리어의 스펠링과 발음이다. 헝가리어를 읽기 위한 모음의 발음. 시작부터 멘붕이 오기 시작했다.
영어의 a.e.i.o.u 도 상황에 따라 발음이 달라 복잡한데, 헝가리어에는 á, ö, ű 처럼 위에 붙는 것들이 있고, 모두가 미묘하게 발음이 다르다.
"볼, 볼, 볼"
우리 말로 표현하면 다 "볼"인데 같은 "볼"이 아니다. 사실 글을 쓰면서도 그냥 볼과 점 하나 찍힌 볼과 두개 찍힌 볼의 차이를 설명하기가 어렵다.
그나마 아직까지 잊지 않고 기억하는 건 s와 sz의 발음 차이다. 헝가리어는 s를 슈라고 발음하고 sz가 우리가 흔히 쓰는 영어의 s발음과 같다. 그래서 우리가 Budapest를 부다페스트라고 발음하는 건 잘못 된 발음이고, 바른 표현은 부다페슈트다.
그리고 y의 이름이 입실론이라는 것, w를 듀플라 븨라고 읽는 것, 그 외 몇 가지 단어나 문장들만 기억에 남아있다. 아. 한없이 가벼운 기억의 무게.
이왕 배우기로 마음 먹고 시작한 것, 끝까지 완주하고 헝가리어를 잘 배웠으면 좋았을텐데 중간고사 이후 학원을 그만두게 되었다.
친한 친구가 태교 여행으로 헝가리에 와서 우리 집에 2주간 머무르게 되면서 학원 일정을 매일 소화하기가 애매해졌다. 2주간 수업을 빠지고 다시 학원에 가니 이미 배운 내용들이 너무 많아 도저히 따라가기가 힘든 상황. 혼자 배우는거면 그래도 하는데까지 해보자고 나갔을텐데 수업 중에 다른 학원생들과 계속 대화를 주고 받아야 하는 상황이 되다보니 상대방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버벅대는 나 자신에게 화도 나고 해서 그냥 신포도로 치부하고 학원을 그만 두기로 했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외부적인 것이 아니라 내부적인 이유였다. 학원 수업이 끝나고 집에 돌아와 거울을 보면 낯빛이 어둡다는 말이 이런거구나 싶을 정도로 얼굴색이 시커멓게 변해있고, 미간에 주름이 깊게 파여 있었다. 내가 평생 여기 살 것도 아니고, 이렇게까지 스트레스를 받으며 이 언어를 배워야 하나? 안하고 싶다. 뭐 이런 생각이 들어 억지로 몸을 이끌어 그 공간에 앉혀두는 것이 점점 힘들어졌던 것 같다.
"아들, 엄마는 헝가리어 하나 배우는 것도 이렇게 힘들고 스트레스가 쌓이는데 넌 헝가리어 말고 다른 말도 같이 배워야 하니 많이 어렵겠다. 니가 얼마나 힘든 일을 해내고 있는지 새삼 깨닫게 되는 것 같아."
늘 하고 싶은 것을 잘 해내고, 공부도 남보다 곧잘 한다고 자신했던 내게 실패와 포기를 알려준 헝가리어 공부는 그저 내 삶의 오점으로 남는 실패담일 뿐일까?
아니다.
나의 실패가 때로 누군가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관점의 변화를 가져다 주기도 한다.
나는 이 일을 통해 좀 더 넙대대한 마음을 갖게 된 것 같다. 우리 아이뿐 아니라 가르치는 아이들에 대해서도. 실패할 수 있고, 넘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그냥 조금 부족한 그 모습 그대로 받아줄 수 있는 마음이 생겼다.
실패한 내가 실패한 너를 손가락질 하지 않고, 손잡아 함께 일어나는 그런 세상이 된다면 지금보다는 좀 더 아름다운 곳이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