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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야 Dec 20. 2021

7. 저녁이 있는 삶과 주재원 호랑이

 헝가리에 살면서 가장 부러웠던 것이 그들의 '저녁이 있는 삶'이었다.

4시 반 정도면 일을 마치고 퇴근하는 아빠들 덕에 오후 시간에 아파트 놀이터에 가면 온 가족이 함께 노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어느 날 친한 동생이 어이없는 일을 겪었다며 말을 꺼냈다.

 "언니, 낮에 자주 나오는 A동 여자애랑 엄마 알지?"

 "어. 기억나. 금발에 영어 잘하는 헝가리 엄마 말하는 거지?"

 "맞아. 내가 매일 애랑 둘이서만 놀이터에 나가서 노니까 어제 그 엄마가 너는 싱글맘이냐고, 혼자 아이 키우기 힘들겠다고 얘기하는 거 있지?"

 "진짜? 그래서 뭐라고 했어?"

 "할 말이 없더라고. 그 엄마들은 맨날 아빠도 같이 나와서 애랑 놀아주는데, 우리 남편은 주말에도 바빠서 애랑 놀아주긴 커녕 그나마 시간 나면 골프 치러 가기 바쁘잖아."

 "여기 주재원들 다 비슷하지 뭐. 헝가리 직원들은 일찍 퇴근하는데 주재원들만 남아서 뭔 일을 그렇게 많이 하는 거니? 맨날 일 있다고 늦게 오고. 일을 해서 늦는 건지, 회식 때문에 늦는 건지 모르겠지만 말이야."

 "내 말이. 오죽하면 아빠가 없는 줄 알고 힘내라는 얘기를 하겠어. 동네에서 얼굴 보기가 힘드니 그런 말이 나오지."

 "사실 며칠 전에 동물원에 다녀왔는데, 5시 거의 다 되어 도착해서 동물들이 대부분 우리에 들어가고 안보이더라고. 그런데 웬일인지 호랑이 우리에 호랑이가 떡 하니 나와 있더라. 반가워서 호랑이 구경하다 설명서 읽어보고 빵 터졌잖아."

"왜?"

 "한국에서 온 호랑이더라고. 주재원 호랑이. 헝가리 동물들은 다 퇴근해서 우리에 들어갔는데 주재원 호랑이만 퇴근 못하고 동물원을 지키고 있는 거냐며 같이 간 엄마들이랑 한참을 웃었어."

 "그렇네. 주재원 호랑이 안됐네."


 "남편들도 그러려니 하면서 이해해야지 어쩌겠어? 마음은 애들이랑, 가족이랑 같이 보내고 싶은데 상황이 그렇게 못하게 만드는 거라고 믿어 주자. 하하"

"언니는 속도 좋아."

 

 헝가리에서도 한국에서도 '저녁이 있는 삶'이 참 어려운 과제였는데 코로나로 회식이고 술자리고 전부 금지되니 퇴근 시간이 강제로 빨라졌다. 게다가 엄마, 아빠는 재택근무를, 아이는 원격 수업을 하는 바람에 온 식구가 집에서 복작복작.

 

 우리가 원하던 '저녁이 있는 삶'이 이런 건 아닌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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