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 일상-한정판

by baekja

며칠 전쯤이었다. 늘 똑같았던 급수장에서 언덕 아래쪽으로 넘어가는 순찰로가 뭔가 달라져 있음을 깨닫고 가던 걸음을 멈추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둠이 짙게 깔린 순찰로에 손전등에서 퍼져나가는 희미한 빛이 닿자 장막이 걷히며 그 아름다움이 드러났다. 들국화가 우리가 가는 길을 제외한 모든 곳에 피어 말 그대로 꽃길을 만들고 있었다. 차분하면서도 귀여운 모습을 숨기지 않는 들국화는 그 흰색이 은은하게 손전등의 빛을 반사하며 밤하늘의 별처럼 순찰로를 밝히고 있었다. 그저 감탄하다 옆에 있는 후임에게 말을 걸었다. “나도 작년 10월 중순부터 순찰을 돌아서 이런 건 처음 봐. 9월 말에만 볼 수 있는 길인 것 같은데?” 그리고 후임이 대답한 말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그렇군요. 이거 한정판이네요.”


이렇게 땅에서 볼 수 있는 순간의 아름다움이 있는가하면 하늘에서 볼 수 있는 순간의 아름다움이 있다. 추석 언저리쯤. 새벽 순찰을 돌고 있을 때 본 하늘은 너무나 인상적이었다. 서쪽에서는 너무나 밝고 둥근달이 밤이 물러가는 옅고 푸른 하늘에서 빛나고 있었고 해가 뜨는 동쪽에서는 자주 볼 수 있었던 분홍빛이나 붉은빛이 아닌 금빛이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밤의 제왕이 밝은 하늘에서도 은은하지만 차가운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냄과 동시에 낮의 황제는 그에 대응해 자신의 도포 자락을 금빛으로 바꾸어 천천히 자신의 시간이 왔음을 주장했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 그 풍경을 보는 나는 마치 인공적인 합성과도 그 장면을 한 눈에 담으며 그 화려함에 취해있었다.


이런 자연에서 순간의 아름다움을 충분히 느꼈다면 사람들과 부대끼는 곳에서는 순간의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 현재 나는 한 생활관의 생활관장을 맡고 있어 근기수가 아닌 좀 더 후임기수들과 같은 생활관을 사용하고 있는데 저번에 맡았던 기수 중에 아주 웃긴 후임들이 있었다. 한 저녁 시간, 청소가 끝나고 다 같이 생활관에 모여 수다를 떠들던 중 갑자기 과거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하더니 팬티를 훔쳐 입은 데에까지 그 이야기가 이르렀다. 사건은 갑이 팬티가 없어 을의 팬티를 훔쳐 입었다는 아주 간단한 것이었지만 그것을 가지고 갑과 을이 싸우는 게 웃겼다. 그 와중에 갑이 갑자기 자신은 드로즈를 입지 않는다며 다시는 훔치지 말라고 팬티를 주었고 을은 또 그걸 소중히 받아 챙겼다. 그러나 을은 거기서 끝내지 않고 그 팬티를 자기 코에 대더니 킁카킁카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거기서 내가 갑이 그렇게 좋으냐고 물어보니까 그저 말없이 웃더니 을은 팬티 냄새를 한 번 더 맡았다. 그걸 본 갑은 격노했고 또 싸우기 시작했다. 이 싸움의 마무리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종국에 갑이 팬티를 훔친 사실로 을을 거의 구석으로 몰았다. 그러자 마지막으로 던진 을의 한 마디. “야! 자수했잖아! 그만해! 이 개XX야!” 아. 방귀 뀐 놈이 성낸다더니. 딱 이 상황이다.


이렇게 한바탕 웃을 일도 있지만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해야 하는 상황도 온다. 어제 근무 때였다. TV에서 걸그룹의 웨이브가 나오고 있었는데 그걸 본 우리 부대 한 장교님이 웨이브를 따라하며 자기 잘하지 않느냐고 칭찬해달라고 했다. 하.하.하. 정말 죽고 싶었다. 웃기긴 했지만 꼴 보기 싫은 것도 당연히 있었기에 처신을 어떻게 해야 할지 정말 곤란했다. 거기다 평소에 썩 이미지가 좋지 않은 분이시라 정말 더 싫었다. 뭐 언제 저 장교님이 웨이브를 타며 춤을 추는 걸 보겠냐며 쓴웃음을 지으며 상황을 넘겼다.


자연도 아름답고 사람들과 함께 지내는 것도 즐겁지만 역시 밥 때만큼 행복한 시간이 없다. 군대에서만 먹을 음식이라면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역시 군대리아를 빼놓을 수 없다. 군대리아는 예전의 닭 패티에서 벗어나 종류가 좀 더 다양해졌다. 불고기 패티를 넣은 불고기 버거, 새우를 튀긴 패티를 넣은 새우 버거, 구운 햄과 치즈를 넣어 먹는 햄치즈 버거, 그리고 길다란 소시지에 케찹을 뿌려먹는 핫도그가 있다. 여기에 취향에 따라 딸기잼이나 샐러드, 피클을 넣어 먹으면 된다. 군대에서 먹지 않아도 나름 먹을 만한 수준인 것 같다. 물론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이 버거들의 반찬으로 나오는 감자튀김이지만. 하지만 급식이 항상 이렇게 잘 나올 수는 없는 법. 그런 날에 B.X.의 냉동식품과 라면은 우리에게 한줄기 빛이다.


하지만 당연히 물품이 부족한 날이 온다. 컵라면과 냉동식품 모두 부족한 날이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봉지라면을 집어 드는데 우리 같이 작은 부대에 인덕션이나 가스레인지가 있을 리가 만무하다. 봉지라면을 잘 뜯어 뜨거운 물을 부어 먹는 뽀글이는 그럴 때 훌륭한 컵라면의 대용이 된다. 아마 환경호르몬이니 뭐니 하며 사회에서는 절대 하지 않을 짓이지만 부대에서 먹는 뽀글이는 그런 걱정을 까맣게 잊게 만들 정도로 맛있다. 여기에 머리가 좀 좋은 사람들은 내열 용기를 가져와 뜨거운 물과 라면을 넣고 전자레인지에 돌려먹는데 컵라면과 뽀글이와는 다른 진짜 끓인 라면의 맛을 느낄 수 있어서 이것도 아주 좋다. 아마 이렇게 이 악물고 별 짓을 다해가며 라면을 먹는 것도 군대라서 경험할 수 있는 ‘한정판’일 것이다.


사격을 하거나, 기지를 방어하는 훈련을 하고 방독면을 착용하고 CS가스를 마시며 눈물, 콧물 다 흘리는 것도 군대에서만 해 볼 수 있는 경험일 것이다. 아마 예비군을 제외하고는 다시는 할 일 없을 것이다. 물론 없어야만 한다. 이 짓을 다시 한다는 건 정말 괴로운 일이니까. 하지만 인생에 다시없을 추억을 남길 수 있다는 것에 분명한 장점이 있다. 어차피 한 번 할 거 이것저것 해서 이야깃거리라도 남겨 가야하지 않겠는가. 이런 한정판 이야기를 다시는 만들어 낼 수 없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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