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험난하고도 찬란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모름지기 여러 개의 얼굴을 갖기 마련이다.
자식으로서의 얼굴, 부모로서의 얼굴, 연인 또는 배우자로서의 얼굴, 직장인으로서의 얼굴, 좋아하는 취미에 푹 빠져있는 진정한 자신으로서의 얼굴, 찬찬히 생각하다 보면 다섯 손가락 정도는 금방 접힌다.
그렇다면 우린 몇 개의 얼굴을 갖고 살아가고 있을까,또 언제부터 얼굴이 생기기 시작했을까, 그리고 그 얼굴을 과연 잘 수행하며 살아가고 있을까?
나는 고작 열세 살 먹은 초등학교 6학년 학생이 가지고 있던 여러 개의 얼굴이 생각난다. 단 한 조각의 힘듦이나 벅참도 보이지 않고 훌륭하게 자신의 얼굴들을 수행했던 그 아이, 진수가 떠오른다.
진수의 첫 번째 얼굴은, 학부모의 얼굴이었다.
진수의 가족은 세 명이었는데 베트남에서 온 어머니와 초등학교 1학년인 여동생이 있었다. 어머니가 생계를 맡은 모양인지, 여동생을 돌보는 일은 오로지 진수의 몫이었다. 단순히 놀아주는 일이 아니었다. 여동생을 깨우고, 밥 먹이고, 양치시키고, 함께 등교하고, 집에 데려가고, 숙제를 챙기는 것까지 모두 진수의 일이었다. 진수의 첫 번째 얼굴을 알게 된 것은 학기 초 매일 5분씩 반복되는지각 때문이었다.
"진수야, 등교시간이 자꾸 5분씩 늦는데?"
"아, 죄송해요. 선생님"
"늦잠 자니?"
"아니요. 저 1학년에 동생 있는데요, 동생 데리고 오느라 자꾸 늦어요. 교실까지 데려다줘야 해서요."
6학년 교실은 5층에, 1학년 교실은 1층에 있으니 동생을 데려다주고 올라오느라 조금씩 늦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그때까지는 동생을 특별히 잘 챙기는 오빠정도로만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진수의 여동생인 진아 담임선생님께 교실로 전화가 걸려 왔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6학년 2반에 하진수 학생 있죠?"
"네, 진수 있어요. 혹시 무슨 일 있으세요?"
"아, 저희 반에 하진아라는 아이가 있는데, 부모가 전혀 케어를 못하는 것 같아서요. 진아 오빠가 진수 맞죠? 진수는 좀 어때요?"
"진수는 그냥 평범해요. 착하고요."
"다행이네요. 다름이 아니라, 지금 1학년 초라 내야 할 서류랑 준비물이랑 잔뜩 있는데 부모가 연락을 잘 안 받아서요. 정말 죄송하지만, 진수한테 부탁 좀 하려고요. 이따 점심시간에 진수 좀 저희 교실로 내려보내주시겠어요?"
그렇게 진수는 일 년 동안 진아의 각종 가정통신문과 준비물을 해결하기 위해 두 교실을 바쁘게 오갔다. 사춘기라 이것저것 신경 쓰일 만도 한데, 진수는 자신의 일을 묵묵히 해냈다.
'진수야, 진아 담임선생님께서 오늘 잠깐 들러달래'라고 넌지시 말을 전할 때에도 늘 평온한 얼굴이었다. 언젠가 진수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진수야, 진아 것도 챙기느라 힘들지 않아?"
진수는 왜 그런 것을 물어보냐는 듯, 태연히 대답했다.
"아뇨, 괜찮아요."
진수의 두 번째 얼굴은, 통역사의 얼굴이었다.
진수의 어머니는 한국어가 굉장히 서툴렀다. 학기 초에 부모가 직접 적는 학생기초 조사표도 진수의 글씨로 삐뚤빼뚤 적혀있을 정도였다. 나는 진수 어머니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고, 진수 어머니는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소통의 부재는 여러 군데에서 드러났다. 회신해야 하는 가정통신문은 항상 늦었고 1학기에 실시한 전화상담은 '네? 다시 한번 말씀해 주시겠어요?'의 연속이었다. 진수가 얼마나 예쁘고, 바른 아이인지 입이 마르도록 칭찬했는데 진수 어머니가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것이 아쉬울 지경이었다.
"진수야, 어머니랑 어제 전화로 상담했는데 혹시 뭐라고 말씀하셨어?"
"네? 별 말 안 하셨어요. 그런데 선생님, 저희 엄마 말 이해하셨어요?"
"음, 사실 소통이 좀 어렵더라고. 혹시어머니는 이해하셨을까 싶어서 물어본 거야"
"저희 엄마도 잘 못 들으셨을 거예요"
"그래? 선생님이 진수 칭찬 엄청했는데!"
칭찬했다는 말에 눈 맞춤을 피하며 부끄러워하던 진수가 넌지시 말을 건넸다.
"혹시 선생님, 제가 엄마 말은 잘 알아들을 수 있는데, 2학기에 상담 또 있잖아요. 그때는 학교로 오는 상담 신청하라고 말씀드릴까요? 저도 같이 앉아있을게요"
진수의 사려 깊은 생각이 기특했다. 그렇게 2학기 상담은 교실에서 이루어졌다. 수줍은 모습으로 인사를 했던 소탈한 모습의 진수 어머니가 생각난다. 진수의 선한 눈빛이 어머니를 빼닮은 듯했다.
"선생님, 엄마가 오늘 일하는 시간 바꾸느라 엄청 고생하셨대요."
진수는 배시시 웃으며 얘기했다. 나는 진수의 어머니께 표정과 몸짓을 곁들여 최대한 또박또박 진수의 학교생활에 대해 전했다. 상담 내용의 9할은 칭찬이었다. 진수가 공부는 좀 어려워해도 친구들과의 관계가 좋고, 항상 성실한 태도로 학교 생활에 임하고, 동생도 너무 잘 챙긴다고 입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진수는 옆에서 내 말을 유심히 듣더니 어머니가 이해하지 못하는 내용을 베트남어와 한국어를 섞어 설명을 했다.
"진수야, 어머니께 더 물어보고 싶은 것 없으시냐고 여쭤봐"
"선생님, 엄마가 선생님께 감사하대요. 저 예뻐해 주신다고요."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화기애애한 상담이었다. 이후에도 진수는 나와 어머니 사이의 통역사를 자처했다. 현장체험학습비를 지원받는 것, 중학교 배정원서를 작성하는 것, 졸업앨범비를 스쿨뱅킹에 넣는 것, 학예발표회와 졸업식에 참석하는 것, 세세한 설명이 필요한 일을 전달했다.
"진수야, 어머니께 설명 따로 드렸지? 이해하셨니?"
"네, 제가 말씀드렸어요."
노파심에 물어본 질문들에 진수는 항상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던 기억이 난다. 내가 진수였다면 어땠을까. 조금의 불평도, 짜증도 내지 않는진수였다.
진수의 마지막 얼굴은, 바로 유튜버의 얼굴이었다.
여느 아이들이 그렇듯 진수도 게임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유튜버로서 꽤나 활발한 활동을 하는 모양이었다. 다른 아이들의 말을 들어보니 자신의 게임 플레이 영상을 편집하여 업로드하기도 하고, 실시간 방송을 켜서 중계도 한다고 했다. 초등학생 희망직업 상위권에 번듯이 올라와있는 '유튜버'나 '크리에이터'가 바로 진수가 꿈꾸는 일이었다.
"야, 하진수 너 구독자 50명 됐더라?"
"어, 맞아!"
"영상 재밌더라, 나도 구독했어"
진수의 유튜브는 그 해 6학년 아이들의 화젯거리였다. 선망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용기를 갖고 실행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또래친구들도 잘 알고 있었다.
우연히 진수의 유튜브 채널에 들어가 본 적이 있다. 다소 엉성한 편집과 자막 속 틀린 맞춤법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최선을 다해 만든 정성스러운 영상과 자신감 있는 목소리에서 진수의 열정과 순수함이 느껴졌다. 댓글창에 있던 진수의 답글이 생각난다.
'댓글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직 실력은 부족하지만, 더 열심히 만들어볼게요!'
정말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는 진수였다. 집안일로, 학교생활로 바쁜 와중에도 꿈을 좇는 열세 살 아이가 얼마나 있을까. 진수는 단연코 훌륭했다.
나는 어릴 때 어떤 얼굴을 갖고 있었을까. 돌이켜보면 튼튼한 울타리 아래 보호받으며 사는 지극히 평범한 어린이의 얼굴이었을 것이다. 한 조각의 부담도, 책임도 없이 그저 어른들의 말을 잘 따르고 건강하게 학교생활을 하면 족한어린이의 얼굴이었을 것이다. 진수는 자신의 얼굴들을 어떤 마음으로 수행했을까, 부담스럽거나 어렵지는 않았을까, 자신이 선택한 얼굴들이니 묵묵히 받아들였을까, 문득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