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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단단 Jun 05. 2024

다른 친구가 흘린 우유를 닦아준다는 것은

01. 연대하는 마음


바야흐로 각자도생의 시대다. 리는 함께 사는 법을 잊어버리고 있다. 황금만능주의와 능력제일주의, 지독한 비교문화와 존중과 배려의 상실은 이 좁은 땅의 사람들을 모두 냉담하게 만들었다. 분명 과거에 이웃이었을 우리는 경쟁자가 되었고 이제는 서로 행복을 방해하는 존재들, 배척하고 혐오해야 마땅한 이들이 되었다. 가뭄에 콩 나듯 뉴스에 등장하는 누군가의 목적 없는 선행을 마주할 때마다 경외심보다 이질감이 앞서는 시대에 공동체성은 상실된 지 오래다.


다른 사람보다 잘 사는 것이 인생의 우선순위가 고, 남의 불행은 나의 행복을 증명하기 위한 수단이 되면서 세상에는 수천만명의 '나'만 남았다. '나'만 잘 살면 되고, '나'만 괴롭지 않으면 된다. 세상이 원칙과 정의 없이 흘러가도 나에게 불편함을 주지 않으면 상관없다. 다른 사람들이 굶든, 억울한 일을 당하든 다 개인의 책임이니 동요하지 않는다. 언제부터 이렇게 삭막해졌을까. 우리는 타고나길 '나만 아니면 돼'의 삶을 살아온 것일까.


열 살 남짓한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다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아 보인다. 교실이라는 사회 공동체를 살아가는 아이들에게서 문득 '너'와 '나'의 구분 없이 함께 살아가는 순수한 선의를 발견할 때가 있다. 사람 간의 본능적인 '연대' 말이다.






요즘 아이들은 희망자에 한해 우유급식을 먹는다. 예전에 비해 음식을 억지로 먹이는 추세도 아니거니와, 알레르기가 있거나 소화가 어려운 아이들도 많아서 희망에 따라 자율적으로 운영된다.


우유 한 팩을 원샷해버리는 아이들도 있지만, 한 번에 먹기 어려운 아이들은 종종 우유 입구를 열어놓은 채 책상 모서리에 두고 홀짝홀짝 마시곤 한다. 문제는 아이들이 수업시간이나 쉬는 시간에 절대 가만있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신의 팔꿈치가, 때로는 지나가는 짝꿍이 위태롭게 서있던 우유를 건드리고 우유는 높은 확률로 바닥에 쏟아진다. 교사 입장에서 우유가 쏟아지는 것이 특별한 일은 아니지만, 거듭된 주의에도 불구하고 우유가 쏟아지면 한숨부터 나오기 마련이다. 수업흐름이 끊길 뿐만 아니라, 쏟은 우유의 냄새가 꽤나 오래가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액체를 요령껏 닦지 못한다는 것도 한몫한다.


5학년 국어시간, 어김없이 그날도 반쯤 출렁이던 우유가 바닥으로 직행했다. 안 마실 거면 입구를 잘 닫아놓거나 책상 안쪽으로 안전하게 놓으라고 입이 닳도록 말했건만 소용없었다. 교사도 사람이다. 훈계시작할 찰나 갑자기 이곳저곳에서 아이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가장 멀리 있는 분단의 아이까지 삼삼오오 일어나 말없이 사물함에서 자신의 두루마리 휴지를 가지고 왔다.



"지우야, 옷에 안 묻었어? 일단 이걸로 닦아"



"이 정도면 얼마 안 쏟아졌네, 금방 닦을 수 있겠다"



그러면서 아이들은 두루마리 휴지를 한껏 손에 뭉쳐 뜯은 다음, 바닥을 닦기 시작했다. 누가 시키지도 않은 일데 아이들은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한다는 듯 바닥을 닦았다. 평소에 자기 자리조차 제대로 청소하지 않고, 우유냄새만 맡으면 토할 것 같다며 아우성치는 아이들이었는데 웬걸, 아무 상관없다는 듯 움직이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선생님, 대걸레 빨아와도 될까요?"



어떤 아이들은 대걸레를 빨아와서 바닥을 박박 문지르기 시작했고, 또 어떤 아이들은 창문을 열었다. 상황이 깨끗이 정리되는데 1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할 일을 마친 뒤 제 자리에 돌아가 앉는 아이들을 보며 듣기 싫은 말부터 시작하려던 나의 성급함이 부끄러웠다. 맞다. 의도가 없는 실수였고, 불편함을 끼쳤을지언정 큰 일은 아니었고, 누군가 도와준다면 금방 해결될 일이었다. 한숨 고르면 아무 문제가 없을 일을 그르칠 뻔했다. 



"친구에게 어려움이 있을 때 먼저 나서서 도와주는 게 쉬운 일이 아닌데, 내 일처럼 도와주는 모습이 정말 훌륭하다 얘들아. 지우도 나중에 다른 친구가 곤란한 상황을 겪고 있으면 먼저 도와줄 수 있겠다. 그렇지?"



지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나와 상관없는, 다른 이의 우유를 기꺼이 닦아주는 그 마음이 참 귀했다.






최근, 사람들이 서로에게 더 매정해지고 박해진 것을 느낀다. 특히 자신의 잘못에 관대한 것에 비해 타인의 잘못에는 이보다 엄격할 수 없을 정도로 칼 같고, 대방이 이익을 보면 자신이 손해라도 보는 듯 질겁하고 경계한. 수천만 명이 매일 새로 시작되는 100미터 달리기 경주에서 동시에 출발하는 것처럼 산다.


경제발전이라는 공동의 목표가 사그라든 이후, 단시간에 일구어낸 고효율 경제발전의 불순물만 남아 무한경쟁과 비교, 갈등세상으로 사람들이 내몰려져 여유가 없는 탓일 테다. 누군가와 끊임없이 비교하며 행복을 느끼도록 강요된 세상 속에서 따뜻한 시선과 관용을 바라는 것이 환상일지도 모르겠으나, 그럼에도 '내 한 몸 건사하면 되지', '나한테만 아무 일 없으면 되지'의 마음이 전염되는 현재 상황은 매우 안타깝다. 


다른 이를 돌아볼 여유도 없고, 굳이 마음 쓸 필요성을 못 느낌에도 함께의 치를 망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고민 끝에 내린 답은 한 명의 개인은 생각보다 나약하고, 우리는 서로를 보완하며 살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현대 사회에 이르러 사회 제도와 기술의 발전이 개인의 삶을 꽤나 독립적으로 지탱해주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세상에는 개인의 역량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흐름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역사를 봐도 그렇다. 지금 당장이라도 예기치 못한 국제정세의 변화, 법과 제도의 변화, 사건사고로 곤두박질칠 수 있는 것이 인생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를 간과한다. 평소에 공동체의 문제나 타인의 어려움이 내 일이 아니라며 무관심했던 사람이 평생을 온실 속의 화초처럼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그때도 각자도생을 말할 수 있을까. '함께'의 정신을 잃어버린 세상에서는 차가운 무관심만 존재할 뿐이다. 내가 편할 때의 각자도생과 내가 어려울 때의 각자도생은 완전히 다른 차원이다. 그래서 연대하는 습관이, 문화가 필요하다.


살아갈수록 세상살이가 정말 녹록지 않음을 느낀다. 한국 사회가 우리를 경쟁과 비교의 화신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은 상당히 뼈아프지만, 지금도 늦지 않았다. 적어도 내가 앞으로 살아갈 세상과 미래세대에게 물려주고 싶은 모습을 희망할 수 있다. 하루에도 수없이 마주치는 이들을 경계하기 전에 저들도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해 보는 것은 어떨까. 회사 동료, 출근길 만원 버스의 옆람,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는 이웃, 편의점에서 물건을 계산해 주는 직원, 일처리를 도와주는 공무원, 동네 병원의 의사 선생님까지 그들도 지구의 작디작은 점으로 함께 살아가는 동행자일 뿐이며, 혹시 모를 나의 구원자 내가 그들의 구원자일 수도 있다. 


연대하는 마음은 거창한 것이 아니. 웃음이 전염되듯 누군가의 따뜻한 시선과 호의, 선행이 돌고 돌아 내게 돌아오고, 나의 마음이 또 누군가에게 돌고 돌아 가 닿는다고 믿는다. 그 마음만 잃지 않는다면 복잡한 인생 좀 더 믿고 살아갈 용기가 생기지 않을까. 


짐도 나누면 가볍다.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애써 모른 척하지 않는, 때로는 서로의 아픔에 공감하고 기꺼이 짐을 나누어질 수 있는 그런 세상을 꿈꾸는 것이 결코 사치가 아니길 바란다.




[연대] 여럿이 함께 무슨 일을 하거나 함께 책임을 짐. 한 덩어리로 서로 연결되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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