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부지의 융통성이 만들어낸 빵
아부지는 대부분의 한국 중장년이 그렇듯이 융통성이 넘친다. 매뉴얼이나 규정이 주어졌을 때 그대로 따라 하지 않는다. 스스로 판단했을 때 더 나은 방법이 있다면 그 방법으로 일을 진행한다. 어릴 때 주말이면 부모님은 나와 동생을 산에 데려가셨다. 등산을 하다 이정표가 나오면 아부지는 이정표에 표시되어 있는 대로 가지 않으셨다. 머릿속으로 산에서 우리의 위치를 가늠해보고는 표시되어 있지 않은 길로 앞장서 가셨다. 결과는 반반이었다. 예상보다 빨리 목적지에 도착한 경우도 있었고 가다가 길이 뚝 끊어져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아부지의 이런 융통성은 빵을 만들 때에도 어김없이 적용되고 있다.
발효종 제임스가 다시 생겨난 이후로 아부지는 이런저런 빵들을 만들어보고 계신다. 이번에는 'Bread&Circus' (도림북스)에 나온 호두빵을 만드셨다. 호두빵을 만들기 위해서는 발효종을 하루 숙성시켜 스펀지종을 만들고, 드라이이스트를 하루 숙성시켜 비가를 만들어야 한다. 하루 동안 발효시킨 스펀지종과 비가를 넣어 반죽을 한 후 다시 하루 동안 냉장고에 넣어 숙성시킨다. 이튿날 반죽에 각종 곡물을 섞어준 후 다시 3~4시간을 발효시킨다. 약 50시간의 기다림이 지난 후에야 빵을 굽는다.
스펀지종과 비가는 빵을 더 부드럽게 만들었다. 발효종을 그냥 넣었을 때보다 빵의 식감이 더 폭신폭신했다. 다양한 견과류는 호두만 넣었을 때보다 더 고소한 맛을 냈다. 여러 견과류의 고소함이 발효종 특유의 신맛을 감소시켜 발효종의 산미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우리 가족들도 식사 대신으로 즐길 수 있었다.
아부지의 융통성은 좋은 결과를 가져올 때도, 나쁜 결과를 가져올 때도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 발휘한 융통성은 대성공이었다. 이번의 성공은 그냥 융통성에서 나온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과장을 조금 보태서 최근 아부지는 하루의 절반 정도를 빵을 연구하면서 시간을 보내신다. 레시피를 적으면서 재료의 양을 늘려보기도, 줄여보기도 하며 결과물을 상상한다. 유튜브를 보며 대체할 수 있는 재료를 찾는다. 빵을 반죽하고 발효시키면서 빵의 질감을 발전시킬 방향을 생각한다. 이러한 꼼꼼한 연구를 바탕으로 한 융통성이기에 베이킹에서만큼은 대부분 좋은 결과를 내시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