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입사원 오리엔테이션이 끝난 후 배정된 부서 내에서 업무를 시작하게 되었다. 업무 교육을 받았음에도 막상 자리에 앉으니 멍하게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하였다. 오리엔테이션 때 배웠는데... 실제로 부딪혀가며 일을 배우는 것과 교육만 듣는 것은 큰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업무를 시작하며 사수에게 제일 먼저 배웠던 것은 출근하면 화장실이나 어디 가기 전에 노트북부터 켜 놓으라는 것이었다. 습관이 되어 있지 않다 보니 몇 번 깜빡해서 지적을 받았었다. 꼭 이렇게 해야 되나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기본적인 회사의 문화는 따르는 것이 맞다고 생각되었다.
비몽사몽 첫 회의
어리바리한 채로 첫 회의를 참석하게 되었다. 첫 회의인데 참석자들이 많았던 기억이 난다. 구매부서뿐만 아니라 다른 부서에서도 참석하였고, 나는 맨 뒷자리에 앉아 있었다.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는데, 조금 우스운 이야기일 수 있지만 의자가 너무 편했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에 안락한 의자는 전날 술을 마시고 늦게 잠들었던 나에게 고요한 수면 시간을 만들어 주었다. 비몽사몽간에 졸음을 이기려고 싸우는 동안 어느새 회의가 끝이 났다. 회의실을 나오는데 팀장님이 나를 쏘아보는 것 같았다. (이건 순전히 나의 느낌) 직접 뭐라고 말은 하지 않았기에 뜨끔한 것으로 끝이 났다. 내가 졸고 있는 것을 보았는지는 아직까지도 잘 모르겠다.
회의는 어떻게 마쳤어도 문제는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이었다. (사실 듣질 않았으니 기억을 할 것도 없었다.) 이제 회의 내용을 바탕으로 업무를 시작해야 하는데 너무 막막하였다. 사수에게 솔직히 말하고 물어볼 수도 있었을 텐데 그때의 내겐 그 정도의 조그만 담대함도 없었다. 눈치를 보며 대충 시간을 흘려보내었다. 이후에도 여러 번 회의 중에 졸다가 나오는 경우가 있었다. 내가 무엇을 주관하거나 의견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듣기만 하는 자린데, 가만히 앉아 있는 상태로 졸음을 이기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직장인의 잇템, 커피
사실 지금의 나는 그때보다 더 빡빡한 스케줄을 보내고 있다. 그때는 솔로였지만 지금은 두 아이의 아빠가 되어 퇴근하고 집에 가서도 할 일이 많다. (애들과 같이 놀고, 기저귀도 갈아주고, 목욕도 시켜주어야 하고...) 하지만 이젠 회의 시간에 조는 경우가 거의 없다. 비결은 바로 회의 전에 커피 마시기. 나는 이전까진 커피를 좋아하지 않았다. 카페에도 잘 가지 않았을뿐더러 가더라도 다른 음료를 마시고, 믹스 커피도 잘 먹지 않았다. 그런데 잠을 깨기 위해서 한두 번 마셔보고 나서 커피의 효과를 경험한 후 지금은 하루에 커피를 마시지 않는 날이 거의 없다.
모든 신입사원들에게 드리는 Tip : 회의 전에 커피 마시기.
Project Milestone (프로젝트 마일스톤)
커피를 마시는 것도 수많은 프로젝트 마일스톤처럼 하루 스케줄의 일부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회의라는 일정에 맞추어 내 몸을 가장 활성화시키기 위해 커피를 마시는 시간 10분을 주는 것이다. 나의 삶을 보았을 때 이러한 세부 시간들 위에 크게 출근 후 업무 시간, 퇴근 후 시간, 주말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 같다.
신규 프로젝트도 준비 과정을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먼저 차량의 컨셉을 잡는 단계가 있다. 이 단계에선 차종, 등급, 디자인, 판매 지역을 결정한다. (멀티미디어 시스템 같이 별도의 마일스톤을 따라 개발을 하고, 여러 프로젝트에 적용시키는 경우도 있다.) 얼핏 보면 1~2달 정도면 끝낼 수 있을 것처럼 보이지만 1년 이상의 많은 시간이 이 단계에 소요된다. 컨셉을 잘못 결정지으면 후에 필요 없는 투자비가 발생할 수 있고, 문제가 있지만 수정하기 어려운 상태에 처할 수도 있다. 예를 들면 네비게이션의 디스플레이 각도만 잘못 설정을 해도 윈도우에 비치는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컨셉을 잘 결정짓고 나면 다음에는 개발 단계가 이루어진다. 이때 각 부품별로 협력사의 Technical proposal을 받고 Validation을 진행함과 동시에 가장 최적의 견적과 솔루션을 제공하는 협력사를 선정하는 일을 한다. 협력사와의 계약도 이 단계에서 맺어진다. 계약을 맺기 위해서 구매, 설계, PD (경우에 따라선 품질 및 물류 부서도 참석)가 참석하는 회의체를 여러 번 거치며 어떤 협력사를 통해 개발할 것인지를 결정한다.
공식적으로 협력사에는 RFQ (Request for Quotation) Package를 보낸다. 이곳에는 견적에 대한 내역 문의와 함께 파트 스펙에 대한 조건, 품질 및 물류에 대한 조건도 포함이 된다. 많은 문서가 준비되어 시스템에 업로드되고, 각 담당자에게 Validation을 받게 된다. 이때 NG (No Go)가 발생하면 수정안을 수립해서 제출해야 한다.
이렇게 개발 단계가 마무리되고 나면 론칭 (Launching) 전 마지막 단계가 주어진다. TGA (Tooling Go Ahead) 즉, 금형 제작이 착수된 이후이기 때문에 협력사 라인을 방문하여 진행상황을 점검한다. 양산 금형과 양산 프로세스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몇 차례에 걸쳐 파트가 제작된 후 완성차 업체 공장에 납품되어 차량이 만들어진다. 차에 어떠한 문제가 있는지 테스트하는 과정을 거치게 되고, 아무 문제없이 OK 결과가 이루어지면 SOP (Start of Production)와 SOS (Start of Sales), 고객들에게 인도될 준비가 이루어진다.
휴대폰은 개발 주기가 6개월 정도로 짧다고 알고 있습니다. 차량은 그에 비하여 긴 개발 주기를 가지고 있으며, 한번 결정되고 나면 수정이 어려운 특성을 갖고 있습니다. 특히 차는 안전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많은 시간과 비용을 들여 부품 하나하나를 신중하고 꼼꼼하게 점검을 합니다. (제 삶은 차보다 훨씬 더 중요한데 대충 흘려버리는 일이 왜 이렇게 많은지 잘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