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 입은 나를 위로해 주셨다
교단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겠지만 *개신교(改新敎)에서는 대부분 세례를 받기 전 까지는 특별한 직분(ex:집사-기독교, 교회의 각 기관의 일을 도맡아 봉사하는 교회 직분의 하나. 또는 그 직분을 맡은 사람)을 부여하지 않고, 평신도 또는 성도로서 지내며 예배에 열심히 참석하고 성경을 가까이하며 교인들에게 모범이 되면, 세례를 받은 이후에 자신이 원하는 분야에서 봉사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게 된다.
대부분 이때부터 집사라고 불리며 1년에 한 번씩 당회에서 임명을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우리 가족이 처음 교회에 다니게 된 건 2005년 10월에 교회에서 열리는 새 가족 축제를 통해서였다.
교회를 다니고 하나님을 믿으며 종교를 갖게 되리라는 생각을 태어나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던 나였다.
그랬기 때문에 그전에는 내게 종교에 대해, 하나님에 대해 얘기를 꺼내는 주변 사람들의 말을 모두 귀찮아하며 한 귀로 듣고는 한 귀로 곧장 흘려버리고 말았었다.
하지만 뜻밖에도 그런 나를 교회로 이끈 건 딸 지니의 노력과 정성 덕분이었다.
남편의 잘못으로 결혼 생활의 신뢰가 깨어지면서 가장 걱정했던 건 딸아이에게도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었다. 가능한 두 사람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채로 본질은 덮어두고 수박 겉핥기식의 해결책으로 문제를 덮어 버리기 급급해하는 남편의 모습에 더욱 상처가 커지고 있을 때였다.
아무리 나와 남편이 숨기려 한다 해도 달라지는 집안 분위기를 딸이 모르지는 않았을 거라 생각했다.
게다가 아픈 엄마의 모습을 보며 혼란스러워하고 부모가 불편한 감정을 드러내는 모습을 보며 자신의 탓이 아닌가 하며 걱정을 드러내는 모습에 안타깝고 미안한 마음은 이루 말할 수가 없기도 했다.
그 무렵 딸은 학교에서 하는 캠페인에 참여해 부모님을 대신하여 고학년이 신입생을 학교에 등교시켜 주는 프로그램에 열심히 동참하고 있었다. 사실 딸은 어릴 적부터 예절 교육을 철저히 시켰던 덕에 온 동네에 모르는 분들이 없을 정도로 인사를 열심히 하는 아이였다. 게다가 내가 어릴 적부터 자란 동네라 오래 사신 동네 어르신 분들은 모두 우리 가족들을 잘 알고 계셨다.
학교 캠페인에 참여해 지니가 함께 데리고 등교했던 신입생이 우리 아파트 같은 동의 같은 층에 사는 아이였고 그 아이의 엄마가 교회의 집사님이었던 이유로 우리를 교회로 초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교회로 나오라는 얘기엔 선뜻 내키진 않았지만 엄마, 아빠와 함께 교회를 다니고 싶어 하는 딸의 노력과 마음에 마음이 흔들리기도 하였고 남편과의 문제로 우울증이 깊어져 이런저런 병이 생기기 시작했던 나에겐 마음을 내려놓을 안식처가 필요하다 생각하고 있던 차였다.
성인이 된 후에 성탄절을 교회에서 보내게 된 건 그 해가 처음이다.
어색하기만 한 마음과 아직 크리스마스와 성탄절의 차이도 구분 못 할 만큼 어리숙하고 이방인 같은 마음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그래서 인가 불편한 옷을 억지로 차려 입혀 놓은 것 마냥 몇 번씩 멀쩡한 옷만 자꾸 추스르고 매만지며 어색하게 앉아 있었다. 그렇게 매주 불편하고 어색한 감정을 느끼면서 흘려보낸 시간이 어느덧 두 달이나 되었다.
매번 주일마다 웃는 얼굴로 반겨 주시는 분들에게 어떤 얼굴로 대해야 할지도 모를 만큼 낯가림이 심했던 내가 꾸역꾸역 주일마다 나가 앉아 있는 모습이 나 스스로도 생경해 고개를 숙이고는 아무도 듣지 못할 만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미쳤지, 미쳤어! 뭐 한다고 여기를 또 나와 앉아 있는 거냐!
그리고는 옆에 앉아 있던 남편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평소에 영업이 주종목인 남편은 여기서도 변함없이 이 사람, 저 사람들에게 사람 좋은 웃음을 흘리며 인사를 해대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난 그런 남편의 귀에 얼굴을 바짝 대고 말했다.
여보, 조금 있으면 여기 꽉 차서 꼼작도 못하겠어. 오늘은 그냥 가자. 크리스마스라서 그런가 사람이 너무 많네. 그러게 2층으로 그냥 가자니까....
남편은 내가 한 얘기를 한 번에 알아듣지 못하고 옆에 앉아 계신 남자분과 긴 인사말을 나눴고 그 사이에 내 옆과 앞뒤로 사람들로 금세 빽빽하게 둘러차기 시작했다.
성탄절 3부 예배였기 때문에 다른 날 보다 더 많은 인원이 한 번에 몰렸고 꼼작 없이 그 자리에 갇혀서 예배를 볼 수밖에 없게 돼버렸다.
남편은 무슨 얘기였냐고 다시 물어 왔지만 이미 움직일 수도 없이 돼버린 상황에 말을 꺼내 봤자 소용없다 생각했다.
그저 매번 한 박자 느리게 구는 남편에게 아무것도 아니라며 한숨을 쉬고 마는 게 다였다. 성탄절에 교회가 어떠리란 걸 미처 생각하지 못한 내 불찰이라 생각하고 말기로 했다.
게다가 친구들과 함께 생전 처음으로 교회에서 성탄절을 맞고 있는 딸을 초등부에서 빼내서 집에 데려가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 될 거라는 것에도 생각이 미쳤다.
결국에는 그냥 조용히 앉아 '처음 교회를 왔던 날 목사님의 영접기도를 따라 했을 때 내가 왜 눈물을 흘렸을까?' 하는 생각 같은 걸 다시 돌이켜 보며 시간이 빨리 흐르기 만을 기다리기로 했다.
내가 여러 사람의 인도를 받고 교회에 왔던 첫날 지겹도록 시간이 가지 않아 온몸을 비틀고 앉아 있다가 목사님이 하시는 영접기도를 따라 하며 너무 당황스럽게도 몇백 명이 모여 앉아 있는 그 자리에서 갑자기 눈물을 흘리다 못해 흐느껴 울었었기 때문이었다.
처음엔 소개해 준 동네 아이 엄마의 얼굴을 생각해서 딱! 한 번만 교회에 나와주려고 했던 발걸음이었다.
그런데 그날 흘렸던 이유 모를 눈물이 내 발목을 붙잡았다. 그 눈물이 나를 매주 교회에 나와 앉아 있게 만들었다.
내가 왜 눈물을 흘렸었는지 그 이유가 알고 싶었다.
그날 영접기도 전 까지는 아무 생각 없이 아니, 오히려 지루하다고 까지 생각하며 빨리 예배가 끝나기 만을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후에 참석했던 여러 번의 예배에서도 그때의 그 느낌을 느낄 수는 없었다.
어색함과 낯가림, 불편함을 누르고서 나와 앉아 있는 예배에서는 좋은 말씀과 언제나 같은 농도로 지나치리만큼 반겨 주시는 분들이 계셨지만 그뿐이었다.
겉으로 평탄해 보이던 삶에 평지풍파를 일으킨 남편과의 일을 화해나 용서 없이 덮고 살게 되면서 진짜 웃음을 잃고 병을 얻었으며 남에게 보여주는 삶과 진짜 나의 모습을 분리해서 사는 모습이 끔찍해지기 시작한 때였다.
영접 기도를 할 때 흘렸던 눈물의 의미를 알면 정말 하나님을 믿고, 내 힘든 삶을 의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 들었기에 불편한 자리였음에도 매주 예배시간에 맞춰 교회에 나와 앉아 있게 되었던 거였다.
그렇게 조금은 언짢고 불편한 마음으로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니라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며 시간을 보내던 중 어느덧 예배시간은 막바지를 향해 가고 있었다.
맨 마지막 순서가 2부 예배의 찬양대와 3부 예배의 찬양대가 함께 모여 드리는 성탄절 *칸타타를 드리는 시간이었고 곧바로 안내 멘트가 나왔다. 그때는 우리 교회가 새로 건축을 하기 전 아직 옛 건물이었던 때라 성가대 석이 따로 없어 성가대원들이 앞으로 줄지어 나와 서기 시작했다. 사실 칸타타가 무엇인지도 전혀 모를 때라 궁금한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많은 인원이 앞에 나와서는 것을 보며 어수선한 마음이 들어 빨리 끝났으면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아무리 연습을 많이 했다고 해도 음악을 전공한 전공자가 몇이나 될까 하는 마음에 노래 잘하는 일반인들을 모아놓고 하는 장기자랑 수준 정도가 아닐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랬던 마음은 첫 곡을 듣고 난 후 씻은 듯이 사라져 버렸다.
물론 다들 아마추어 분들 이셨다.
아니 파트별로 솔로가 필요한 곳에만 이렇게 칸타타나 연주회를 하는 경우 전공자를 쓰기도 하지만 성악을 전공하는 청년부의 학생을 기용하는 경우가 대부분 이기도 하고 우리 교회의 경우에는 소프라노 솔로와 테너를 공부하신 집사님, 지휘하시는 지휘자 집사님이 전공을 하신 분이었다.
내가 사는 곳에서 예술의 전당이 가까워 가끔 악기 연주회도 보고 듣고, 소프라노나 중창단 등의 연주회 등을 접할 기회가 종종 있었지만 이 칸타타는 잘하고 못하고를 얘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다들 노래 좀 한다 하는 분들이 모이셨겠지만 어쨌든 평일엔 자신들의 일상이 있고 주일에 봉사로 모여 찬양을 드리는 분들이었다. 그런 분들이 어느 누구 하나 튀는 목소리 없이 (적어도 내 귀에는) 완벽한 하모니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아니, 주님의 탄생을 기뻐하는 찬양을 부르고 있었다. 어느덧 내 눈에서 또 한 번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내가 교회에 꼭 다녀야 할 이유를 찾게 되었다.
나는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 바로 찬양을 부르기 위해 교회에 나오게 됐다는 걸 깨달았다.
영접 기도 때 흘렸던 눈물의 의미를 당장 알게 되지 못한다 해도 내가 앞으로 반드시 꼭 교회를 다녀야 할 이유를 깨닫게 되었다.
성가대에 들어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것도 가능한 한 빨리!!
그때는 이것이 어떤 뜻인지, 제가 어떤 선택을 한 것인지 미처 깨달을 틈도 없었고 생각할 만한 마음의 여유조차 없었습니다. 저의 의지로 스스로 선택한 일이라고 만 여겼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교회에 발을 들여놓은 순간, 아니 제가 주님을 믿기 훨씬 더 전부터, 제가 세상에 태어나기 전부터 예비됐던 순간이었다고 지금은 생각합니다.
그리고 예배가 끝나자마자 새 신자를 담당했던 목사님께 연락을 드리고 정말 나답지 않은 모습으로 말을 꺼냈다.
목사님, 정말 죄송한데요.... 부탁 한 가지 드려도 될까요? 제가 3부 예배 성가대를 하고 싶은데 새 신자는 세례 받기 전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들었거든요. 저 성가대 할 수 있도록 허락 좀 받아 주실 수 있을까요?
담당 목사님의 웃으시던 표정이 묘하게 난감한 표정으로 바뀌고 있었다.
게다가 난감한 일은 그것 한 가지가 아니었다.
1, 난 악보를 제대로 볼 줄 몰랐다.(초등학교 때 피아노 체르니 100번까지는 쳤지만 그건 25 년 전 일이었고 이젠 다 잊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2, 난 노래를 잘 못 부른다.
3, 기초적인 청음(聽音) 역시 안된다. 청음이 안되니 악보를 보고 맞는 음을 소리 내는 것도 불가했다.
산 넘어 산, 총체적인 난국이었다.
하지만 다음 주, 세례 받지 않은 교인 중에 최초로 성가대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받았다.
모르겠다. 이젠 주님만 믿고 몸으로 부딪혀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개신교(改新敎):기독교
16세기 종교 개혁의 결과로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떨어져 나와 성립된 종교 단체 또는 그 분파를 통틀어 이르는 말.-
표준국어대사전 발췌
*칸타타:음악 17세기에서 18세기까지 바로크 시대에 발전한 성악곡의 한 형식. 독창ㆍ중창ㆍ합창과 기악 반주로 이루어지며, 이야기를 구성하는 가사의 내용에 따라 세속 칸타타와 교회 칸타타로 나눈다.-표준국어대사전 발췌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