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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나루 Apr 15. 2021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마음

찰나(刹那)의 순간 만 이라도

봄이 다가오면서 일주일에 한 번씩 비가 오고 있다.

4월. 5월에 오는 비는 '내린다'라고 말하지 않고 '온다'라고 표현하고 싶어 진다. 그래야 춥고 시린 겨울이 가고 따뜻한 봄이 하루라도 빨리 다가올 것 같은 마음이 들기 때문이다.


이렇게 몸이 아파지기 전엔 비 오는 날을 정말 좋아했었다.

밖을 돌아다니면서 옷이 조금 젖어도 우산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듣기 좋았다. 

밖을 나가지 않고 집안에 머물러 있어도 창밖에 내리는 비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바라보고 있어도 좋았다.


다만, 그때 그 비에도 밖에서 일하셔야 하는 분들의 노고를 생각할 만큼의 생각은 여물지 않았었다. 그저 내 생각, 내 마음만 있었을 뿐.




한 가지, 두 가지... 몸에 병이 생기고 눈 뜨는 것이 고통인 시간을 살고 있게 되면서 하늘에서 내려오는 모든 것은 내 통증을 더욱 심화시키는 증강제가 됐고 그것들을 즐길 수 있던 마음의 여유는 눈곱만큼도 남아 있지 않게 되어 버렸다.


비 내리기(눈 내리기) 이틀 전부터 온 몸은 (그렇지 않아도 아픈 몸은) 만신창이가 되고 새로 해 넣은 이가 깨질세라 입안에는 보호구를 상시 착용한 채 지내야 하며 정해진 약보다 더 먹지 않기 위해 초인적인 자제력을 발휘해야 한다.


그리고 이제는 이 비를 맞으며 바깥에서 일하셔야 하는 분들을 걱정하는 마음에 잠시의 기도를 잊지 않게 되고 바깥에서 오토바이로 배달일을 하시는 분들의 안전을 위해 기도 하게 됐다.


얼마 전 글을 읽던 중에 자살을 시도한 환자가 응급실로 실려오면 화가 나셨다는 응급실 의사분의 글을 읽었다.

그 의사분의 마음이 충분히 이해되고도 남았다.

내가 죽고자 버린 하루가 누군가에겐 살고 싶은 귀중한 하루였을 수도 있다는 말도 들어 알고 있다.

그리고 생명의 소중함을 말해 무엇하겠는가!


하지만,

그 의사분께서 그 환자의 history에 대해서 무엇이든, 단 한 가지라도 제대로 아는 것이 있었을까?

무슨 권리로 그 환자에게 화를 냈다는 건지 난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 사람이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서 누가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다는 말인지?

내가 죽고 싶은 만큼 고통스러운 일이 있었다는 것을 타인이 납득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어쨌든 나를 살릴 의사가 나에게 화를 낸다?

그게 가당키나 한 일인지.


자살을 옹호하고 본인이 본인의 죽음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단지, 본인이 아닌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안타까워하고 살리려 최선을 다하고 같은 일이 반복되는 일을 막는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 어느 누가 자신의 죽음을 좋아서 선택할 수 있겠나?

혹여 내가 고통에 못 이겨 다시 죽음을 선택한다면 어느 누가 내게 화를 내고 돌을 던질 수 있냐 말이다. 그럴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더도 말고 내가 지금 일상으로 겪는 통증을 10분만 겪어봐도 그 소리 십리 밖으로 썩 달아날 거라 장담한다.


내 통증을 이해해 달라는 얘기가 아니다.

통증이 심한 사람은 죽을 수도 있다는 걸 이해하라는 얘기는 더더욱 아니다.


*무엇이든 나와 다른 선택을 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한 번쯤 헤아려보고 배려하고 위로하는 마음을 가져보길 바다.


자신이 어떤 자리에 서 있는 사람인지 생각해 봐야 할 때가 아닐까.


그리고 찰나의 순간만 이라도

우리에게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마음이 필요할 때인 것 같다.

이전 01화 [Prologue] 아픈 것은 내 잘못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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