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나(刹那)의 순간 만 이라도
봄이 다가오면서 일주일에 한 번씩 비가 오고 있다.
4월, 5월에 오는 비는 '내린다'라고 말하지 않고 '온다'라고 표현하고 싶어 진다.
그래야 춥고 시린 겨울이 가고 따뜻한 봄이 하루라도 빨리 다가올 것 같은 마음이 들기 때문이다.
이렇게 몸이 아파지기 전엔 비 오는 날을 정말 좋아했다.
비록 옷이 조금 젖더라도 밖을 돌아다니면 듣는 우산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좋았다.
집안에 머물러 창밖에 내리는 비를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바라보고만 있어도 좋았다.
한 가지, 두 가지... 몸에 여러 가지 병이 생기고, 눈 뜨는 것이 고통인 시간을 살게 되면서 하늘에서 내려오는 모든 것은 내 통증을 더욱 심화시키는 증강제가 됐고 그것들을 즐길 수 있던 마음의 여유는 눈곱만큼도 남아 있지 않게 되어 버렸다.
비나 눈이 내리기 이틀 전부터 온몸은 만신창이가 될 만큼 아프고 새로 해 넣은 이가 깨질세라 입안에는 보호구를 상시 착용한 채 지내야 하며 정해진 양보다 약을 더 먹지 않기 위해 초인적인 자제력을 발휘해야만 한다.
얼마 전 글을 읽던 중에 자살을 시도한 환자가 응급실로 실려오면 화가 나셨다는 응급실 의사의 글을 읽었다. 내가 죽고자 버린 하루가 누군가에겐 살고 싶은 귀중한 하루였을 수도 있다는 말을 하며 자살자들은 생명의 소중함을 모르는 것 같다고 열변을 토했다.
그 의사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는 충분히 이해되고도 남았다.
하지만, 그 의사는 그 환자의 history에 대해서 무엇이든, 단 한 가지라도 제대로 아는 것이 있었을까?
무슨 권리로 그 환자에게 화를 냈다는 건지 난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 사람이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서 누가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다는 말인가?
내가 죽고 싶은 만큼 고통스러운 일이 있었다는 것을 타인이 납득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어쨌든 나를 살릴 의사가 나에게 화를 낸다? 말도 안 되는 일이라 생각한다. 월권이고 교만이다.
자살을 옹호하며 스스로 본인의 죽음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단지,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안타까워하며 살리려 노력하고 같은 일이 반복되는 것을 막는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 어느 누가 자신의 죽음을 좋아서 선택할 수 있을까?
자살은 스스로를 살해하는 무섭고 고통스러운 일이다.
혹여 내가 고통의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 죽음을 선택한다면 어느 누가 내게 화를 내고 돌을 던질 수 있겠냐 말이다.
그럴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더도 말고 내가 지금 일상으로 겪는 통증을 10분만 겪어보기 바란다.
내가 겪은 배신과 몰이해와 방관과 무책임을 견뎌봤으면 좋겠다.
내 고통을 이해해 달라는 얘기가 아니다.
고통이 심한 사람은 죽을 수도 있다는 걸 이해하라는 얘기는 더더욱 아니다.
무엇이든 나와 다른 선택을 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한 번쯤 헤아려보고 배려하고 위로하는 마음을 가져보길 바라는 것이다.
자신이 어떤 자리에 서 있는 사람인지 생각해 봐야 하는 순간도 필요하다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찰나의 순간만 이라도 우리에게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마음이 필요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