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집과의 궁합 (2021,12)

Oct 6. 2025

어느새 이사 온 지 한 달이 다 돼 간다.

아직 확신하기엔 이르지만 이 집과는 합이 잘 맞을 것 같다는 좋은 느낌이 든다.

여태껏 살아온 어떤 집보다도 조용하다.

난치를 선고받은 뒤, 내 두통은 세상의 모든 소리에 예민하게 반응한다.
사람이 사는 곳에서 완전한 고요 속에 산다는 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빠르게 인정하고, 그 안에서 일정 부분 스스로 타협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놀이터에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끼야아악~ 하고 익룡이 포효하는 듯, 비명같이 질러대는 웃음? 소리는 여전히 견디기 어렵다.
데시벨의 문제가 아니다. 그건 아이들만이 낼 수 있는 순수한 에너지의 폭발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사랑스럽지만, 그 웃음이 비명으로 변할 때마다 내 머릿속 깊은 곳에선 무언가 고약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그 비명소리는 뇌를 부풀어 오르게 만들고, 두개골의 막히지 않은 틈과 안구의 동그란 틈 사이로 순두부 같이 연약하고 상처받은 뇌가 뭉글뭉글 비집고 새어 나오게 만드는 듯하다.

심한 두통이, 여러 가지 고통들이 사람을 피폐하게 만들어 버린다.

이 집에서는 그 모든 소음이 만들어내던 근심과 분노가 자취를 감췄다. 하루 종일 들리는 소리라 해봐야 낮게 조용히 이야기하는 딸의 목소리, 아픈 엄마 곁에서 발소리를 죽이고 다니는 강아지들의 톡톡 거리는 발걸음 소리가 전부였다.
두통이 가라앉는, 기적 같은 찰나의 순간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비록 몇 페이지에 불과하겠지만, 책을 읽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희망이 생긴다.
언제나 나를 위로하던 책 읽기가, 조심스레 내 곁으로 돌아오고 있다.

이 집은 하루 종일 빛으로 가득하다.
복도 끝에 있는 남편의 방을 시작으로 딸의 공부방, 그리고 딸의 침실을 지나 거실과 안방까지, 햇살이 천천히 옮겨 다니며 집 안을 채운다.
어두운 순간도, 어두운 구석도 찾아볼 수 없다.

햇살 아래에 있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마음이 환해진다.
항상 광합성이 부족해 볕이 드는 시간에 베란다 쪽에 누워 있는 것을 좋아했던 나는 더할 수없이 행복한 순간들을 즐기고 있다. 곁에는 10살이 되도록 큰 병 없이 무사히 견뎌준 사랑하는 강아지 아들 콩이가 언제나 함께 하고 있다.

옛 동네에서 쓰던 작은 TV와 김치 냉장고를 13년 만에 바꾸었다.
오래 쓰던 물건을 보내고 새 살림을 맞이하니, 마치 새로운 계절이 시작된 듯 산뜻한 기분이 든다.

게다가 어린 시절의 잔재가 남아 아직도 핑크색을 좋아하는 딸의 방에는 분홍색 헤드가 달린 침대를 들였다.

생각보다 너무 마음에 들어 하는 모습에, 더 일찍 사주지 못한 게 조금 미안할 정도였다. 아마 그 침대는 결혼하기 전까지는 쓰게 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부디 그날이 조금이라도 빨리 오길 바란다.

딸이 하루빨리 결혼해서 지긋지긋한 엄마 간병의 일상에서 벗어나 자기 인생을 살 수 있길 바란다는 뜻이다. 꼭 결혼해야만 탈출할 수 있는 건 아닐지라도, 그런 이유로라도 독립을 꿈꾼다면 아픈 엄마로서는 그저 다행일 뿐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아주 많이 아프고, 때로는 죽음에 이를 만큼 고통스러운 엄마를 두고 완전히 독립한다는 건 우리 딸에겐 불가능에 가까운 일일지도 모르겠다. 엄마가 세상 누구보다 간절한 사람들은 이해할 수 있을 실 거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