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나를 지키는 우리 딸 (2021.02)
딸은 3,27kg의 정상 몸무게로 손가락 10개, 발가락 10개 하나도 빠짐없이 건강하고 예쁜 모습으로 태어났다.
하지만 동네에 소문이 짜~하게 퍼질 정도로 요란했던 내 입덧 탓이었는지(임신 7주가 되자마자 구토가 시작되었습니다. 물만 마셔도 두 배로 토해낼 만큼 심했어요. 냄새에도 극도로 예민해져 친정집 안방에 문을 꼭 닫고 누워 있어도, 냉장고 문이 열렸다 닫히면 그 미세한 냄새에 속이 뒤집혀 구토를 했습니다. TV 화면에 나온 음식 사진만 봐도 화장실로 달려가 온몸을 덜덜 떨며 토했고, 끝내는 옅은 갈색의 쓴 물까지 뱉어내야 했습니다. 이런 증상은 막달까지 이어졌습니다. 이러다 정말 죽겠구나 싶을 즈음에 아이를 낳았습니다) 지니는 태열과 아토피, 여러 가지 호흡기 질환, 중이염, 아데노이드 비대증 등으로 백일이 지난 무렵부터 7살이 되던 해까지 1년에 10달 정도는 병원을 제 집처럼 들락 거렸다.
어떤 날은 큰 비가 쏟아지고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어둡고 무서운 빗속을 뚫고 한밤중에 응급실로 내달렸다. 또, 어떤 날은 아기 옷은 물론이고 내 옷이며 차 바닥까지 온통 토사물로 뒤덮인 채, 급히 아기를 안고 응급실로 들어가야 했다. 예진을 보는 순간, 인턴 선생님의 가운 앞섶에 탈수를 걱정하며 먹였던 보리차와 우유를 그대로 뿜어내기도 했다.
호흡기 질환과 중이염, 아데노이드 문제가 항상 그렇듯 증세가 심해지면 우선 열이 나기 시작하고 코로 숨을 쉬는 것을 힘들어하게 되고 기침과 가래, 콧물 때문에 잠을 재우는 것이 엄청 어려워진다.
그래서 잠든 아이를 누이면 제대로 숨을 쉬지 못해 아이를 세워서 안던지 아니면 항상 업고 있어야 했다. 업고 있다가 고열 때문에 유모차에만 누이려고 해도 아프면 내게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남편은 아이와 놀아주는 것은 백점인 아빠였지만 아이가 아플 때는 약을 잘 먹일 줄도, 음식을 먹일 줄도 모르고 쩔쩔매기 일쑤였다. 그래서 한 번씩 아이가 아프기 시작하면 일주일이던 한 달이던 낮에는 친정 엄마가, 밤에는 내가 돌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고열 때문에 입원을 하거나 중이염 수술, 아데노이드 수술, 축농증 수술 같이 병원에 오랫동안 입원을 해야 할 경우도 남편은 단 하루도 나와 교대해주지 않았다. 잠시라도 나를 쉬게 해 줘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 듯했다.
그 당시에 남편에게 왜 말하지 않았는지 궁금해하실지 모르지만 듣기 좋은 꽃노래도 한두 번이지 나보다 다섯 살이나 더 연상인 남편에게 삶의 모든 것을 시시콜콜 잔소리처럼 알려줘 가며 사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돌이 지나서부터 7살이 될 때까지 6년 동안 아픈 아이를 케어하며 워킹맘으로 살아가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날짜가 얼마가 걸리던 회사에 휴가를 내야 하는 사람은 언제나 나였고, 남편은 그나마 퇴근 후에 병원에 들러 2~3시간, 주말에 반나절을 나와 함께 돌보는 것이 다였다.
그마저도 회식이나 갑작스러운 저녁식사 약속으로 오지 않는 날이 많아 나를 더욱 지치고 힘들게 했다.
시댁은 지니가 아파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반복되는 입원에 어쩌다가 시어머니만 한 번쯤 오실 뿐 아이가 아프다는 사실을 애틋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우리 지니가 아들이었어도 그랬을까 하는 마음에 항상 속이 상했지만 지금 되돌아보면 오는 만큼 가는 법이다. (시댁에선 꼭 아들을 낳아야 한다고 노래를 했거든요)
애달픈 마음에 병원 문턱이 닳도록 병문안을 오며 먹을 만한 것, 마실 만한 것, 가지고 놀만한 장난감을 가지고 오는 사람들은 오로지 친정 식구들 뿐이었다.
아무리 가습기를 세게 틀고, 빨래를 잔뜩 해서 방안에 빽빽이 걸어놔도 아이의 코와 입은 잔뜩 말라 헐면서 피가 났고, 누런 콧물은 쉴 새 없이 줄줄 흘렀다. 양쪽 귀에선 염증이 심해 물과 고름이 같이 흘렀다. 아이가 소리를 제대로 듣지 못하는 지경이었다.
열이 40°C 가 넘었고 해열제는 듣지 않았다.
집에서 견디다 못해 새벽에 응급실로 날아갔고 다시 입원을 하여, 아이에게 맞는 항생제를 찾고 그게 효과를 발휘할 때까지 아이를 업고 밤새 병실 밖 복도를 천천히 돌고 또, 돌며 아이를 조금이라도 재우려고 애를 썼다.
너무 지치고 힘들어 졸면서 걷고, 울면서 걸었다.
늦은 밤이라 병실 밖 복도 조명이 어두워서 다행이라 여겼다. 눈물을 훔칠 새도 없이 온 얼굴에 눈물이 범벅이 되도록 울었다.
다들 자고 있는 새벽 시간이라 소리도 낼 수가 없어 이를 앙다물고 목구멍으로 울음덩어리를 억지로 삼켜야 했다.
병실 밖의 조용하고 어두운 복도를 몇 시간씩 걸으며 여러 가지 생각으로 마음이 복잡했다.
나만 이렇게 고단한 건가? 이번엔 뭐라고 말하고 휴가를 내야 되나? 휴가가 남아 있긴 한가?
휴가 안 내주면 그깟 은행 그만 두지 뭐. 우리 지니가 이렇게 아픈데....
다 나 때문이야. 임신했을 때 내가 너무 못 먹어서 아기가 이렇게 아픈 거야.
엄마 잘못 만나서.... 안쓰러운 내 새끼...
아침 식사가 나올 시간이 다 되어 열이 조금 내리면 지니는 간신히 잠에 들었다. 병상 침대를 세우고 베개와 담요로 고정한 채 아이를 누이면 그제야 나도 몇 시간 만에 보호자 침대에 간신히 엉덩이를 붙이고 앉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 나를 지켜보던 옆 침대의 아기 엄마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어... 저기... 괜찮으세요? 아기 제가 깨는지 보고 있을 테니까 세수라도 하고 오실래요? 많이 힘드시죠?
너무 피곤하고 지쳐 누구든 말을 걸어오는 것이 귀찮았지만 내 눈이 빨갛게 부은 것을 보고 말을 건네 는가 보다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고, 우리가 입원한 방 아기들 그 누구도 지니보다 나아 보이는 아이는 없었기 때문에 그 와중에도 예의 바르게 대답하려고 노력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금방 친정 엄마 오실 거예요. 고맙습니다.
그랬더니 맞은편에 심한 천식으로 아픈 아이를 케어하고 있는 아기 엄마가 냉장고에서 주스 한 캔을 꺼내 내게 건네주면서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죄송해요. 너무 힘드신 거 같은데, 주제넘은 말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기운 내세요. 지금 많이 힘드시죠? 얼마나 힘드시겠어요. 밤새 몇 시간을 업고 있었으니... 그런데 우리 아기들 업어 줄 수 있는 시간 그렇게 많지 않아요. 조금 더 크면 업어주고 싶어도 못 업어 주거든요. 엄마가 많이 힘들지만 업어주는 것만큼 아이한테 안정감 주는 스킨십이 잘 없대요. 너무 힘들면 우리가 도와줄 테니까 기운 내세요.
너무 힘들어서 잔뜩 힘을 주고 있던 몸과 마음이 순식간에 몰캉 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금세 눈가에 눈물이 차올랐다.
새벽 시간에 혼자 피곤하고 지친 몸으로, 몇 년째 진전 없이 아픈 아이 때문에 힘들어 울던 내가 조금 부끄러웠다.
거기에 입원해 있던 아이들은 다들 심장 판막에 구멍이 있거나, 천식이 심해 가습 텐트 바깥으로는 나올 생각을 못하거나, 그 두 가지 경우보다 더 아픈 아이들도 있는데 도리어 그 아기의 엄마들이 나를 위로해주고 있었다. 아픈 것에 경중이 없다는 것쯤은 나도 안다. 하지만 그 위로가 여유가 없는 마음과 불편한 몸 때문에 칭얼대는 아이에게 자야지 열이 내리지 라며 짜증을 부렸던 마음마저도 반성하게 만들었다.
아무리 부모라도 한결같은 마음을 유지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입원기간 내내 아픈 아이를 돌보는 씩씩한 전사 같은 엄마들을 보면서 생각했다.
내게 어떤 순간이 와도 지니가 엄마를 필요로 할 때가 오면 나는 최선을 다해 지켜주고 네 곁엔 엄마가 항상 함께 있을 거라는 사실을 알려 주어야겠다 마음먹었다.
그렇게 아이를 업은 채 수없이 병원을 오가며 흘린 눈물, 새벽 병실 복도를 돌며 삼킨 눈물, 그리고 아이 앞에서는 보이지 않으려 애쓰며 삼킨 눈물까지.
그렇게 나는 ‘눈물의 어부바’로 딸을 키워냈다.
그리고 22년 뒤인 지금, 눈물의 어부바로 키운 딸이 엄마를 안아 일으킨다. 어리고 연약하기만 했던 딸이 내게 받은 사랑을 고스란히 내게 되돌리며 나를 지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