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되는 비극으로 더 이상 상처받지 않기를(2020.11)
*애이불비-하다 哀而不悲하다
슬프지만 겉으로는 슬픔을 나타내지 아니하다.(인용-표준국어대사전)
CRPS 진단을 받고 나서, 내 것이라 믿어왔던 삶의 모든 것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친정 가족들과의 불화로, 여태껏 붙잡고 있던 믿음이 허상이었음을 깨닫기 전까지 나는 오직 다른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사람처럼 살아왔다.
부모님의 입안의 혀처럼, 감정 쓰레기통처럼, 가족들의 120 다산 콜센터처럼, 114처럼, 정신과 의사처럼, 때로는 흥신소 심부름센터처럼.
그런데 내가 죽도록 아픈 병을 얻고, 죽을 때까지 아파야 하는 삶 앞에 섰을 때 그토록 아끼고 사랑하며 살았던 가족들은 나를 외면했다. 그렇게 6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슬픔과 고통이 한계를 넘어서면 사람은 말 그대로 미쳐버릴 수 있다는 걸 나는 알게 되었다.
슬픔과 외로움, 고통과 절망이 나를 완전히 잠식했다.
24시간 단 한순간도 멈추지 않는 통증은 죽고 싶을 만큼 아프고, 막막했다.
참고, 또 참고, 다시 참고 나니 ‘죽고 싶다’는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저 그렇게 되도록 만들어졌다.
나는 자살로 내몰렸고, 중환자실에서 일주일을 사경을 헤맨 끝에 다시 딸아이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내가 생각하는 애이불비는 슬프지만 표현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표현할 수 없는 상태였다.
자살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그렇게 되도록 내몰려지는 것이다.
어릴 적부터 난 다른 사람의 감정에 잘 휩쓸리곤 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슬픈 장면이 나오면 금세 주인공의 마음에 동화되어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고, 책을 보면서 고난을 겪는 주인공을 보면 그 주인공의 감정에 이입이 되어 책을 보는 내내 아픈 마음을 숨길수가 없었다.
심지어 연말에 TV에서 시상식을 보며 수상을 하는 가수나 배우가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고도 따라 눈물을 흘리기 일쑤였다.
이렇게 다른 사람의 마음에 잘 동화되고 이해하게 되면서 공감능력을 가진 good listener로 친구들과 지인들, 그리고 무엇보다 가족들에게 큰 도움을 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일이 결코 쉬웠던 적은 없었다.
CRPS를 앓기 전부터 혈관성 두통과 베체트, 우울증, 불면증, 역류성 식도염, 위염. 목 디스크. 척추관 협착증, 부정맥 등을 앓고 있어 병원 입원이 잦았던 나에게 사람들은 아랑곳없이 자신들의 어려움과 고민들을 얘기해 왔고 그건 가족들도 마찬 가지였다.
물론 내 건강을 걱정하거나 염려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어느 순간부터인가 그들의 얘기를 들어준 후 나는 항상 그 후유증에 시달리기 일쑤였다. 항상 밝고 싹싹해야 했던 나는 마음 한구석에 커다란 덩어리 같은 것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나도 누군가에게 힘들고 어렵다 말하고 싶었지만 어느 누구에게도 내 얘길 털어놓을 상대는 없었다.
어려운 일이 생기면 모든 것들을 혼자 감당하고 감내하며 해결해 나갔고, 일이 다 끝나고 편하게 얘기할 수 있을 때에나 가볍게 웃으며 지나가는 일처럼 말을 꺼내는 일이 다반사였다.
주변에 가족이 함께 모여 살고 있었지만 나 스스로는 언제나 외롭고 고단하다 여기며 살았다.
그런 것들이 쌓이고 쌓여 스트레스가 되고, 울분이 되고, 눈물이 되었다.
어느 순간부턴가 TV에 얼굴을 비추던 유명 연예인이 자살을 하여 생을 달리하는 사건이 생기면 나는 마치 가족을 잃은 듯, 가까운 지인을 잃은 듯 그 슬픔이 깊어 며칠 동안 헤어 나오기 어려웠다. 더군다나 그 당시의 언론에선 서로 앞다퉈 자극적인 기사들을 쏟아내며 연신 새로운 기삿거리를 만들어 낼 때마다 며칠씩 크게 홍역을 치러야만 했다.
고(故) 최진실 씨가 죽던 날 슬픔으로 몸을 가누지 못하는 나를 보며, 지금보다 훨씬 어렸던 딸은 그런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크게 걱정을 했었다.
엄마는 왜 엄마하고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사람이 죽었는데, 꼭 가족이 죽은 것처럼 그렇게 슬퍼하고 힘들어해? 엄마 그러다 더 아프겠어. 당분간 TV 보지 마요.
이제와 생각해 보면 그 당시에도 스트레스를 넘어서 깊은 우울에 잠겨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모두에게 잘해야 한다는 마음, 힘든 결혼생활을 버텨야 한다는 책임감, 가족에게 내 존재 가치를 증명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나를 짓누르고 있었다.
그 후로도 비슷한 일은 반복되었고 그 당시에 교회에 다니며 하나님을 믿고 있지 않았다면 언제라도 사고를 낼 수 있는 위험한 상태에 있었던 순간이었다.
그리고 수년이 지나 병을 얻게 된 후에 겪었던 여러 가지 일들로 결국엔 난 삶의 벼랑 끝까지 몰리게 되고 말았다.
사람들은 말한다. 죽으려는 사람은 시그널을 보낸다고.
죽고 싶다는 말을 흘리거나, 삶의 주변을 정리하거나, 오히려 가장 힘든 시기에 평소보다 더 밝은 얼굴을 보이기도 한다고.
많은 전문가들은 이것을 ‘살고 싶다’는 강한 신호로 해석한다.
누군가 알아봐 주고 말려 주길 바라는 간절한 도움의 요청일 수 있다는 것이다.
정말 죽음을 선택하는 사람들은 치밀하게 계획하지 않는다.
머릿속으로 끝없이 생각하다가 어느 날 문득 일을 저지르고 만다.
그때 누군가의 전화 한 통, 찾아오는 발걸음 하나, 끊임없는 관심이 이어진다면 사고를 저지를 타이밍을 놓치게 되고 목숨을 구할 가능성은 분명 높아진다.
누가 그런 일을 하겠느냐고 말할지 모르지만 우리 모두가 옆에 있는 사람 한 번씩, 앞에 있는 사람 한 번씩 조금만 더 바라보고, 조금만 더 묻고, 조금만 더 함께한다면 소중한 생명을 잃고 애이불비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일은 줄어들지 않을까.
고(故) 박지선 씨와 그의 어머니의 일로 며칠 동안 호된 몸살을 앓았다. 아무리 드러내려 하지 않아도 몸은 아직 그걸 이겨내지 못하는 것 같았다.
다른 이들에게는 선한 영향과 에너지를 주면서 자신의 병으로는 얼마나 많이 아프고 힘든 시간을 보냈을지 마음이 너무 아프다.
그리고 딸이 가야 할 먼 길을 홀로 보낼 수 없어 함께 떠나신 어머니의 마음 또한 너무 아프도록 선명하게 와닿아 울컥 넘어오는 눈물에 명치끝부터 목이 타는 듯 조여왔다.
우리에게 더 이상 이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더 이상 다른 이의 죽음에 우리의 영혼이 비통해하지 않도록.
우리가 애이불비의 마음을 그러 않고 살지 않아도 되는 날이 오도록 기도와 배려와 관심과 사랑으로 주위를 돌아보길 진심으로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