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게 전하는 사람의 배려와 위로
늦은 밤 피로한 몸을 이끌고 가다 깜깜해진 하늘을 올려다볼 때가 있습니다. 왠지 모르게 다른 세상 같을 때가 있죠. 그럴 때 맡는 공기의 냄새는 잊기도 힘들 만큼 강렬할 때가 있습니다.
학창 시절에는 남들보다 조금 더 나은 대학교를 가기 위한 밤샘이 익숙했고, 그것으로 부족했는지 대학을 졸업할 즈음엔 취업을 위한 스펙 쌓기를 이어가야 했습니다. 유난히 치열했던 10대와 20대에는 유독 깜깜한 하늘을 볼 때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해가 지날 때마다 달라지는 식당 간판들, 밝고 화려한 조명에 괜스레 먹먹할 때가 있습니다. 움직이는 주변과 다르게 나만 그대로인 듯, 내 울타리 안의 세상은 불안하기 짝이 없어 뭔가 공허하고 답답했던 것 같습니다. 막막한 현실에 대한 계획이나 능력의 구체성이 없어, 불투명한 미래가 현재를 뒤흔들어 놓은 듯했지만 결국 달라지는 것은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되죠.
조명과 간판의 화려한 혼란에 휩쓸려 익사할 듯, 밝음과 어둠이 서로 반동하며 섞여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은 꽤 정적이지만 그럼에도 역동적인 느낌까지 받게 됩니다. 이 혼란은 내일도, 모레에도 영원히 지속되겠죠. 그렇게 어둠에 몸을 싣고 가다 혼이 나가버릴 때쯤이 돼서야 집이 보입니다.
점점 빠르게 움직이니 낯설기까지 한 주변의 변화. 이를 알아채고 따라잡기는 꽤 힘이 든 일인 것 같습니다. 이제는 아는 음악, 드라마나 영화도 하나같이 '예전'이라는 이름이 붙어버렸죠. 이런 세상을 쫓아가기 위한 나의 변화는 조금 어설프고 서투르기만 합니다.(젊은 세대가 좋아한다는 음악을 듣는 것은 꽤 지루한 일이네요.)
내가 꽤 좋아하는 음악이나 영화는 남들이 보기에 2%가 부족한 게 당연한 현실. 타인을 이해하는 것도, 그에 공감하는 것도 너무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나의 경험 안에서 세상을 이해하고 바라보는 것이 익숙하기 때문에 무엇이든 온전하게 이해하는 것도, 그것에 공감하는 것도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하물며 낯선 이에게 베푸는 친절이나 배려는 말할 것도 없었죠.
어쩔 수 없이 반복되는 현실을 감당하는 나의 태도. 그건 한 발 물러서서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주변에 매몰되어 본연의 감정마저 허물고 헤매기보다는 차분한 태도로 아우를 수 있는 있는 필요를 알게 되었습니다. 매번 주변에 섞여 분노하고 슬퍼하기보다는 곁눈으로 상황을 바라보는 게 내겐 더 편했던 것 같습니다.
즐거워하는 누군가, 슬퍼하는 누군가와 완벽하게 어울리는 것은 내게 불가능에 가까웠죠. 주변 사람들과 어울리기 위해 고민해봐도 막상 할 수 있는 일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적어도 어떻게 대할 수 있을지는 고민을 했던 것 같습니다.
인생에서 예기치 않게 받는 감동 또는 위로는 의외로 짧은 순간에 있습니다. 낯선 이의 한마디 혹은 잠깐의 격려에 팍팍한 일상 속 온기를 느끼곤 하죠. '있는 그대로의 위로'라고 하는 것은 의외로 높은 난이도를 요구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나의 생각의 틀 안에서만 타인을 판단하고 바라볼 수 있기 때문에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도 어렵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생각 틀 안에서라도 타인을 배려하고 도울 수 있음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억지스러운 자세로 오해를 만들기보다는 사소하더라도 있는 그대로의 마음으로 배려와 위로를 전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내가 받았던 잠깐의 한마디가 큰 힘이 되었던 것처럼 내 마음을 담은 순간의 배려가 다른 이에게 온기를 전할 수 있길. 그저 그 잠깐의 순간에 최선이라는 위로의 힌트가 담겨 있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