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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축복이야 Mar 31. 2024

i와 아이

2024신춘문예당선작, 허성환의 < i >를 읽고-20240331


제목을 보고 바로 요즘 관심 있는 MBTI의 ‘i’를 말하나 짐작했다.

작가는 86년생. 젊은 축에 속하니 조금은 트렌디한 이야기일까?

소설 속은 좁고 작은 곳.  

답답한 마음에 숨이 차서 크게 숨을 쉬기가 어렵다.

방산시장, 노동자, 살인적 노동량, 이런 것들은 70~80년대나 보던 것이 아닌가 하는 의아함에 나도 모를 갑갑함과 어쩜 이런 일이 라는 작은 분노를 일으키게 한다. 인스타 속 화려한 삶들, 고가의 아기용품이나 태교여행은커녕 내 몸 하나 잠시 앉아 쉴 의자가 이렇게나 간절하고 어려운 꿈이어야 한다니.  

          

우리는 고졸이고 토익점수가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의자가 없어도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살아야 했던 것이다.  


당연히, 여전히, 아직도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보이지 않는 계급이 존재한다.

잠시 쉴틈도 없고 허리가 끊어져 나갈 정도의 고통을 느끼면서도 기계처럼 그저 정해진 일을

해내야 하는 노동자계급. 어떤 불만을 제기했다가는 내일의 생활이 보장되지 않기에 토를 달수도 없는 비참한 상황. 한 끼 점심마저도 편의점 간이 의자에 아주 조용히 숨죽이며 앉아 컵라면과 삼각김밥을 먹는 주인공의 상황이 안쓰럽다.             

주인공은 남편이자 아빠인 육체 노동자다.

글 전체에 아이를 생각하고 아내를 사랑하는 애틋한 가장의 마음이 곳곳에 묻어있다. 그러기에 내가 전부였을

당당한 'I'에서 나의 욕구보다는 책임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소심한 'i'로 살아간다.


우물우물, 쩝쩝, 꾸역꾸역 식사하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방산시장으로 돌아와 손수레를 끌었다. 왜냐하면 이제 나는 남편에게서 아빠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단지 그 이유가 전부였다.       



작가는 정말 방산시장에서 200만 원의 월급을 받고 포장용기를 나르는 일을 했나 싶은 정도로 노동현장을 상세하게 스케치한다. 읽다 보면 내가 지금 수레에 4600개의 전자레인지 전용 뼈해장국 용기를 나르느라 허리가 아파오는  것 같고 위태로운 사다리 위로 올라가 에어컨을 설치하느라 온몸이 땀범벅이 된 듯하다.

아니면 작가는 정말 산부인과에서 근무하고 있는 걸까. 내가 임신했을 때도 이렇게 자세히 설명을 해줬던가 싶을 정도로 상세한 표현은 초등학생스러운 의문을 갖게 할 만큼이었다.

초반에는 이런 생생한 묘사를 읽으며 끄덕끄덕 읽어 나갔다면 중후반 이후 문장부터 마음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사람은 작품을 대할 때 자기의 처한 상황에 대입해서 감정이 동하거나 몰입하는 것이 아닐까.

나도 아이를 키우는 부모이기에, 세상의 무게가 내 어깨를 압박해 와도 주저앉을 수는 없는 부모이기에 주인공에게 진심으로 공감할 수 있었다.

    


나는 박스를 들었다. 묵직한 무게가 온몸에 전달됐다. 박스를 손수레로 옮기면서 아내를 생각하고 아내 몸속에 있는 아기도 생각했다.                  




팍팍한 삶이지만 주인공에게는 내 몸이 상하는 노동을 해서라도 지키고픈 가정이 있고 사랑하는 아내에게는 소설을 쓰고 싶다는 꿈이 있다. 1분 1초를 재며 쉴 틈 없이 일을 해야만 하는 주인공이지만 아이의 초음파진료를 위해서는 반차를 쓰고 나무가 필요하다는 아내를 위해 직접 나무를 구하러 이리저리 다닌다. 아내가 필요하다는 나무는 한시도 앉아 쉴 수도 없는 남편을 위한 의자를 만들기 위한 것이다.   

         


아내는 연애 때도 작은 책상과 작은 화장대, 그리고 작은 싱글침대를 썼다. 나는 좁은 방에 살며 좁은 화장실과 좁은 현관을 썼다. 늘 좁은 창문으로 밖을 쳐다봐서 내 시야는 넓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좁은 곳에 사는 남자와 작은 곳에 사는 여자가 만나면 좁고 작아져서 삶은 더 비참해질 거라 판단했다. 그래서 나는 아내와 되도록 빨리 헤어지려 했다. 그러나 아내의 의견은 달랐다. 좁은 곳과 작은 곳이 더해지는 것이 아니고 공간과 공간이 합쳐지는 거라고, 그러니까 혼자 사는 3평과 혼자 사는 4평이 합쳐지면 7평이 끝이 아니라 서로 껴안고 있으면 14평처럼 쓸 수 있다고 했다. 아내의 판단에 나는 아내를 열렬히 껴안고 사랑했다. 그 결과, 나의 씨앗이 아내의 몸에 들어갔다.        



좁디좁고 작디작은 곳에 사는 남자와 여자가 만나 사랑을 하고 가족을 생각하는 새로운 ‘i’가 만들어졌다. 서로의 의자가 되어 고단한 삶에 잠시 휴식을 주고픈 남자와 여자에게서 사랑의 씨앗인 ‘아이’가 탄생했다. 작은 씨앗이던 아이가 조금씩 자라고 그 아이를 품을 만큼 자궁도 커졌다. 괜한 오지라퍼가 되어 커진 자궁처럼 세상도 주인공 가족을 품어줬으면, 힘들지 않게  살아갈만한 자리를 주었으면 바라본다. 서로에게 기댈 곳이 되어주어 안녕히 지내길.


뱃속에서 하루하루 커가는 아이는 힘든 노동을 하는 남편이 잠시 휴식을 할 수 있는, 작은 방안 작은 책상에서 소설을 쓰는 아내가 계속 쓰는 일을 꿈꿀 수 있게 하는 그런 존재이리라.

사랑은 뭔가 크고 대단하고 거창한 것이 아니라 아주 작고 사소한 것, 할 수 있는 것 내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내는 것이 아닐까. 서로에게 작고 짧은 휴식이라도 가질 수 있는 의자가 되어주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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