옳은 것은 옳다고 말하는 용기. 안 돼도 해보겠다는 용기!
구급차를 타고 한 젊은 환자가 실려왔다. 그는 당일 술을 마시던 도중 하루에 종이컵 2컵 정도의 토혈을 했고 주변에 있던 가족에 의해 응급실로 내원했다. 환자가 술에 취한 상태라 의식이 온전하지 못했지만 우리는 응급실 진료의 우선순위가 높은 출혈이 발생한 경우이므로, 침착하게 환자의 안정을 위한 대처를 하고 있었다. 환자를 침대에 눕히고, Vital sign을 측정한 다음, 18G의 굵은 정맥주사를 확보하고 의사의 처방에 따라 비위관을 삽입하였다. (일반적으로 토혈, 흑변은 상부 위장관에서 출혈이 발생한 경우를 뜻한다.) 그런 다음, 비위관을 통해 환자의 위에 출혈이 있는지 위세척 및 배액을 하기 시작했고 옅은 선홍빛의 색임을 확인한 뒤, 지혈을 위해 응급 내시경을 진행하기로 했다.
그렇게 환자의 치료가 이루어지고 있는 도중, 술에 취한 상태로 침상에서 엎치락뒤치락 움직이고 있던 환자가 갑자기 변을 보고 싶다며 화장실을 가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출혈이 의심되는 환자가 움직일 시 저혈압 및 어지러운 증상으로 환자 안전에 위협이 될 수 있으며, 혹시 모를 흑변이 있는지 확인해야 하므로 침상에서 대변을 볼 것을 설명했다. 그렇게 간이 대변기를 갖다 준 뒤 커튼을 쳐서 환자가 볼일을 다 보기까지 기다리고 있었는데, 주변에 있던 간호사와 의사들은 환자가 상부위장관에 출혈이 있으므로 백 퍼센트 흑변을 볼 거라고 예측하고 있었다.
그때 마침 환자가 볼일을 다 봤다며 간호사를 불렀고 나는 환자가 본 대변을 유심히 관찰했다. 그런데 웬걸? 다른 의료진들의 예상과는 달리 정상변이었던 것이다. 코를 막고 손사래를 치며 직접 변을 보기를 거부하는 의사와 다른 간호사들에게 나는 당당하게 정상변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나를 제외하고 응급실에 있던 모든 의료진들이 하나 같이 ‘그럴 리가 없다’며, ‘상부 위장관 출혈이 있었기에 흑변은 당연히 나올 거다’라고 말했고 내가 잘못 본 거라며 과산화수소수를 부어 확인해 보라고 했다. (과산화수소수 용액이 혈액의 헤모글로빈 안에 있는 철 성분과 닿으면 거품을 일으키며 산화과정이 일어난다. 흔히 변색깔을 보고 잠혈이 있는지 확인해 보기 위해 사용하는 방법이다.) 과산화수소수를 가지고 환자가 본 변에 부으려고 하는데 어느샌가 나는 속으로 나 자신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정말 내가 틀린 건가?’ ‘만약 내가 틀린 말을 하는 거면 어떡하지?’ ‘내편은 아무도 없잖아? 하나같이 다 저렇게 말하는데 정말 내가 틀린 거야?’
그렇게 과산화수소수를 부었는데..
결과는 흑변이 아니었다. 안심하고 나는 다시 의료진들에게 가서 흑변이 아니라 정상변임을 알렸다. 그랬더니 코를 막고 한사코 변을 보지 않겠다고 말했던 그들이 직접 변을 들고 와보라고 했고
나는 당당히 과산화수소수 실험 결과를 보여주었다. 변을 직접 보고 나서야 정상변이었음을 믿게 된 의료진. 그제야 내가 한 말이 사실임을 인정했다.
사실 다른 사람들 모두가 Yes라고 말할 때, 혼자 No라고 외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수 있다. 특히, 간호사로서 의사 앞에서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 쉽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간호사는 자신이 본 것, 들은 것, 알고 있는 것들을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당돌함이 필요하다. 옳은 것은 옳다고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 말이다.
물론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틀릴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누구도 항상 완벽하게 맞을 수도 없다. 오히려 실수나 실패를 통해 우린 또 하나의 경우의 수를 배우기도 하고 훗날 성공의 밑거름이 되기도 한다. 스스로를 믿지 못하고 아무 말도 못 한 채 다른 사람의 주장에 이끌리기만 하는 자신감 없는 사람보다 틀린 주장이라도 자신이 믿고 있는 것을 다른 사람 앞에서 표현할 수 있는 용기와 자신감을 가진 사람이 더 힘이 있고 성장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자기 자신을 믿고 당돌해지자. 실패가 끝까지 실패가 될지 아닐지는 자기 자신에게 달려있으니까.
응급실에서는 어떤 응급상황이 생길지 모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중증도가 있을 만한 질환이 의심되거나 우선순위가 높은 질환의 증상을 호소하는 환자들에게는 가장 굵은 정맥주사인 18G 바늘을 사용한다. 약물이 다량으로 들어가거나 수혈이나 강심제, 승압제와 같은 약들은 굵은 혈관으로 투여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숫자가 작을수록 크고 굵은 바늘을 의미한다.) 병동에서는 항상 24-20G 범위의 바늘만 사용했었기에 그에 맞는 혈관들을 상대적으로 쉽게 노릴 수 있었지만, 응급실에서는 웬만하면 80% 이상이 18G 바늘을 사용하기 때문에 그에 맞는 굵고 긴 혈관을 찾아야 하는 것이 처음에는 쉽지 않을 수 있다. 나도 응급실에서 근무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에는 굵기도 굵고 길이도 긴 18G 바늘에 익숙해지기까지 시간이 걸렸었다. 그래서 나름 바늘에 익숙해지기 위해서 일부로 다른 간호사가 주사를 놓겠다고 한 환자들도 내가 대신해 보겠다며 연습해보기도 했었다.
마침 두통을 호소하며 어지러움을 심하게 호소하는 여자 환자가 응급실로 실려왔다. 어지러움에 동반된 구토로 힘들어하는 환자. 그 환자에게 18G 바늘을 꽂으려는데 여간 혈관 찾기가 쉽지 않았는지 다른 간호사들이 하나둘씩 달라붙더니 정맥주사를 잡지 못하고 실패하고 말았다. 그렇게 5번을 찔리고 애써 통증을 참아왔던 환자는 좀 쉬었다가 바늘을 꽂고 싶다며 간호사들에게 나중에 하자고 제안했고 시간이 지나는 사이 환자는 열이나며 복통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의사는 환자에게 흉부, 복부, 골반 CT를 찍어야 한다고 설명했고 이는 조영제 약물을 써서 자세히 관찰해야 하기에 굵은 바늘을 찔러야 함을 알렸다. 이미 앞서 환자의 혈관에 주사를 시도했던 간호사들은 또 실패할까 봐 겁이 나서 다시 시도하기를 꺼려하고 있었다. 아직 시도하지 않은 간호사 중에 한 명이었던 나는 지금 이 환자에게 주사를 놓지 않으면 다음 치료가 이루어질 수 없다는 생각에 무심코 내가 해보겠다며 나섰다.
“선생님, 그거 제가 가서 해볼게요.”
물론 나도 반드시 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100%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단지, 다른 사람이 안된다고 해도 나라고 못할 건 없지 않은가?라는 당돌함? 깡다구로 덤빈 것 같다.
체격이 어느 정도 있었던 여성환자. 나는 그녀의 팔을 걷어서 토니켓으로 묶은 다음, 손등부터 팔의 앞, 양옆, 뒤까지 손끝으로 샅샅이 훑으며 올라갔다. 그러다가 팔 뒤쪽에서 내 손끝으로 만져진 혈관 하나.
럭키! 나는 꽤 난감한 자세였지만 누워있는 그녀의 팔을 90도로 접어서 위로 향하게 한 다음, 위에서 주사를 시도했다. 결과는 성공적!
“선생님 18G 확보했습니다! “
라고 외치는 순간 쏟아지는 환호성. “오오~! 잘했어!! 이제 환자 모시고 CT 가자! “
다른 사람이 안 되는 것을 내가 해냈을 때 느껴지는 그 짜릿함. 한번 맛보게 되면 이 당돌함은 무섭게도 다음 난관들에 대해서도 브레이크를 밟지 않고 덤비게 한다. 그때부터 4살짜리 아이의 가녀린 팔에 18G 바늘을 꽂는다거나 꼬불혈관이 더 많은 할아버지, 할머니와 같이 난이도가 높은 환자일수록 나에게 부탁하는 경우가 많아졌고 나의 정맥주사실력은 나날이 늘어갈 수밖에 없어졌다. 감사하게도^^
간호사에 대한 인식이 이전보다 좋아진 것은 맞지만 간호사를 여전히 ‘아가씨’, ‘저기요’ ‘간호원’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간호사’라는 호칭을 잘 모르시는 어르신 분들이 거의 대부분 ‘아가씨’라고 부르지만 그럴 때마다 “간호사라고 불러주세요.~”라고 당당하게 말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호칭에서부터 상대방을 대하는 태도가 나타나고 부당한 호칭에 상대가 반응하면 이를 인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호칭을 다시 정정하여 선을 그어주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