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카카오톡처럼, 예전 직장의 업무용 메신저는 자기 이름에 마우스 오른쪽 클릭을 하면 대화명을 변경할 수 있었다. 그때 거기에 어떤 부서 직원이 "내 젊음 회사를 위해"라고 썼는데, 본부장님이 우연히 이걸 발견하시곤 이 직원이 누군지 오른쪽 버튼을 눌러서 확인을 해 본 모양이다. 그래서 이 직원은 본부장님으로부터 애사심 강한 직원이라고 칭찬을 받았다.
이렇게 되자 누가 지시한 일도 아닌데, 너도나도 앞다투어 메신저 대화명 작명이 유행이 되어 버렸다. 어떻게 해야 신박한 대화명을 지어서 윗분들의 호감을 얻을지, 이걸로 경쟁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한동안 떠나 있다가 돌아와서 메신저를 켜 보니 세상이 바뀌어 있었다.
"해가 떠도 □□, 달이 떠도 □□, □□가 최고야."
"한 마음 한 뜻으로 다 함께 세계로, 다 함께 힘을 모아 하나로 세계로"
"남편 없이는 살아도 □□없이는 못 살아"
"언제까지나 나의 □□, □□만이 나의 생명"
"어디선가 □□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5%는 불가능해도 30%는 가능하다!"
'나 □□에 뼈를 묻으리"
.......
다들 작명센스가 장난 아니네. 하지만 업무용 메신저에 그런 게 왜 필요해. 한눈에 누가 누군지 알 수 없어서 일일이 마우스 오른쪽 클릭을 해서 상세정보를 보아야 하니 불편한데. 그러든 말든 난 그냥 나야. 내 이름이랑 소속부서로만 나올래.
그런데 어느날 복도통신에 따르면, 높은 분들 회의에서 그 얘기가 나왔단다. 어떤 직원은 아주 보기 좋은데, 다 그런 건 아니더라고. 아, 나도 해야 하는 거야? 해도 시시한 걸 하면 안되잖아. 관리자의 눈을 사로잡을 수 있는 신박한 거라야 하는데 괴롭군. 다른 사람들은 펜만 잡으면 멋진 글이 술술 잘도 나오는데 어째서 나는 고작 한 줄을 쓰면서도 머리를 벽에 박아야 하냐고. 억지로 뭐라도 하나 짜내라면 할 수는 있겠지만 뭐라고 해도 그건 내가 실제로 할 수 없는 일이 되는데 어떡하지. 5%는 불가능해도 30%는 가능하다니 실제로 난 안 되는 일이고, 내 젊음 직장을 위해 바치는 건 때려 죽인대도 못 하겠고, 연인이나 배우자 없이는 살아도 직장 없인 못 살 거라고 한다면 그야말로 뻥이고, 뼈를 묻는다니 무슨 공동묘지냐, 뼈를 묻게?
머리를 쥐어뜯고 있는데 갑자기 전화가 온다. 타 부서 직원이다. 골치아픈 일을 황당한 논리로 떠넘기려 한다. 누굴 바보로 알아, 에잇! 그렇잖아도 메신저 대화명 생각하느라 성가셔 죽겠는데 이건 또 뭐람. 한바탕 하고 끊었다. 또 전화가 온다. 무슨 얘기 할지 뻔하다. 안 받았다. 또 또 온다. 내가 받나 봐라. 그랬더니 메신저로 무슨 말이 날아온다. 열어보고 싶지 않았다. 홧김에 메신저 대화명을 바꿨다.
흥, 난 그런 것 몰라.
다음날, 팀장님이 조용히 부르신다. 뭐지? 내가 뭘 잘못했지? 조용히 회의실에 가서 얘기하자고 한다. "요즘 혹시 많이 힘드나?" 난 영문을 모르고 "네...?" 했는데, 자초지종을 알고 보니 사내 메신저의 내 대화명으로 높은 분께서 주간회의에서 한 마디 하셨다는 것이다(쉽게 말해 메신저 대화명 바꾸라는 거다).
난 무슨 관종처럼 튀는 행동 하나 해 놓고 "어때, 안 어때?" 이러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다(억울하다!). 하지만 거기서 사정을 설명하는 것도 무의미하니 그냥 나 죽었소 하고 무늬연구나 하는 수밖에 더 있나? 아이고, 사람 좀 살자, 사람 좀...
브런치 작가 심사를 받을 무렵. 나는 궁금했다. 나도 브런치 작가가 될 수 있을까? 글쓰기를 제대로 평가받아 보려면 어떤 블로거 분께 자문해 보라는 추천을 받고, 그분께 블로그를 통해 연락을 드렸다. 그분은 독설로 유명한 분이셨지만 아픈 말이라도 좋으니 다른 분의 눈에는 어떻게 보이나 냉정하게 평가를 받아 보고 싶었다. 샘플을 세 개 보내면 무료로 피드백을 준다고 하셔서 세 개를 보냈다.
답신이 왔다. 글이 너무 밋밋하다는 거다. 음식으로 말하면 맛없고 싱거운 음식이고, 이대로는 브런치 심사 통과는 꿈꾸기 어려우며, 운 좋게 된다 해도 이런 글은 아무도 안 읽는다는 요지다. 읽히게 하려면 글에 특징과 색깔이 필요하니 적절한 수사와 기교를 적극 활용하라 한다.
그런데, 나는 그걸 할 수가 없었다. 내 수준에서 처음부터 기교와 수사를 의식하면 느끼한 망작만을 양산하게 될 게 뻔했다. 그전에 똥망을 수없이 싸질러 봤으니 하는 말이다. 수사나 기교는 기간이 누적되면 절로 만들어지는 것이지 처음부터 작정하고 의도할 것은 아니다. 그런 걸 안 해서 맛없는 글이 되더라도 남이 읽든 안 읽든 그 선택은 독자의 몫으로 남겨 두고 싶다. 그리고 언젠가는 이런 나에게도 기술이 생겨서 수사나 기교를 잘 활용할 수 있는 날이 오길 바랄 뿐이다.
그분의 말씀도 틀리다고 보지 않는다. 내 방식이 아니었을 뿐이다. 나는 글에 많은 걸 넣고 싶지 않다(가끔 촐랑거리며 까불 때는 있다). 자극적인 비빔냉면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심심한 평양냉면을 선호하는 사람도 있다. 캐논 변주곡을 연주하면서 나 이 정도 기교 있는 사람임을 보여주려고 원곡에 없는 아르페지오를 넣어 연주한다면? 그걸 좋아할 사람도 어딘가에는 있을지 모르지만 나는 아니다.
글쓰기에 문장 기교부터 말하는 분들의 글에는 눈이 잘 가지 않는다. 내 현주소에서 탐할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음정, 박자가 정확하게 들어간 후에 들어간 기교라면 모를까, 음정, 박자 개판인데 트릴만 잔뜩 집어넣는다고 좋은 연주가 되지 않는 것처럼,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내가 그것을 시도하면 감정 과잉의 느끼한 말잔치만 양산하게 될 것 같았다. 그냥 그대로 작가지원 밀어붙였다. 마음속에 새기는 나의 처세철학도 잊지 않았다.
흥, 난 그런 것 몰라.
이 모든 건 전적으로 내 취향에서 나온 생각이다. 내가 그런 글을 읽고 싶어하니까. 사람의 읽기 취향은 글을 쓸 때도 고스란히 이어지니까. 사람은 자기가 가장 읽고 싶은 글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걸 알았을 때 그때 펜을 집어드니까. 그때 조언을 해 주셨던 그분도 어쩌면 자신의 취향을 말한 건 아니었을까.
내가 좋아하는 성프란치스코의 기도문 중에 이런 말이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에는 최선을 다하게 해 주시고, 내가 할 수 없는 일은 포기할 줄 아는 용기를 주시며, 무엇보다도 그 둘을 구별할 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난 현시점에서 내가 할 수 없는 게 뭔지 알고 싶다. 그걸 무리하게 하려고 들지 않기를 원한다.
그렇게 해서 정말로 그때 그분의 말씀대로 아무도 내 글을 읽지 않게 되더라도 그건 내 현실에 마땅한 일이다. 당장의 욕심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보게 하겠다고 내 깜냥으로 할 수 없는 일에 노력을 기울이고 싶지 않다. 하지만 그래도 설득되지 않는 사람을 종종 만나게 될 테고 매번 똑같은 말 하기도 번거로운 일이니, 그럴 때를 위해 마음속에 두루마리 하나를 꼭 품고 살아가려 한다. 언제든 꺼내서 펼쳐 보일 수 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