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살, 공무원이 되겠다며 호기롭게 퇴사를 하고 사실은 백수로 지내던 때였다. 공무원 시험도 계속 떨어졌고 결국 배운 도둑질이라고 다시 치과를 기웃거렸는데 치과 면접도 다 떨어졌다. 가는 곳마다 원장님도 나도 피차 별로였다. 더 이상 시험을 핑계로 놀 수는 없어 면접을 봤던 곳들이었지만 그 치과들이 구인란에 계속 나오는 이유가 분명히 있었고, 그것이 면접에서도 한눈에 읽힐 정도였다.
그중 B치과 면접 역시 서로 뽑을 마음도, 일할 마음도 없었던 곳 중 하나였다. 그렇게 여러 달 잊고 지내는 도중 갑자기 가장 친한 선배 언니에게서 아침부터 전화가 왔다.
"야 너 빨리 출근해. 지금."
선배 언니는 10년 이상 다니던 치과의 원장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B치과로 옮기게 되었는데, 출근 첫날 갑자기 원래 있던 간호조무사가 도망을 갔다고 했다. 원장님은 노는 후배가 있다는 얘기에 나인 줄은 모르고 우선 부르라고 했던 것이다. 오후에 병원에 도착하여 원장님에게 인사를 건네자 당황스러운 원장님의 눈빛. 크크. 세상이 참 좁네요, 원장님.
오전엔 광주에서 놀고 있었는데 오후에는 B치과에서 임시치아를 깎게 되었다.
직원은 언니와 나, 단 둘이었다. 규모가 작은 치과였고, 환자도 별로 없어서 우리는 참 재미있게 지냈다. 특히 간식을 많이 사 먹었다. 이유는 3인의 점심이 항상 2인분만 배달되었기 때문이다. 반찬만 배달이 되었는데, 치과에 있는 싸구려 밥통으로 아침마다 밥을 지었다.(제일 싫은 일이었다.) 병원 내 환자용 서비스 커피는 '멕스웰 하우스'였다. 후에 내가 퇴사하고 나서 환자가 '지금 세상에 누가 이런 걸 먹어!' 하고 호통을 쳐서 그나마 노란 맥심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내가 결혼할 때 원장님의 축의금은 3만 원이었다. 빵 쪼가리 하나 먹어보라고 사다 주지 않는 짜디짠 원장님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적은 월급을 받고 저런 식의 대우를 받았다. 이곳뿐만이 아니라 예전 개인병원들은 열악한 곳이 많았다. 믿기 힘들겠지만 지방의 작은 병원은 2022년에도 이런 곳들이 있다. 직원 휴게공간 하나 없어 기계실에서 환복을 하거나 정수기도 없어 주전자에 식수를 끓이는, 사람을 참.. 씁쓸하게 만드는 그런 환경들. 지금이라면 더 나은 곳을 찾아갔겠지만 그 당시에는 어리고, 집도 가깝고, 언니도 좋고, 소박하게 좋은 것들이 있었기에 수년 동안 이곳에서 출퇴근을 이어갔다.
그날은 원장님이 점심 약속으로 외출을 했다. 좁아터진 치위생사실에서 셋이 팔을 부딪치며 먹다가 오랜만에 편하게 먹으니 살 것 같았다. 점심시간이 거의 끝나갈 때쯤 원장님이 들어왔다. 손에 뭔가 들려져 있다! 포장된 캘리포니아롤 상자를 우리에게 내밀고 먹어요, 한다.
이 양반이 어쩐 일로 이런 걸 다 사 왔지? 근데 엄청 가벼워, 언니. 우리는 의아함 반 의심 반으로 상자를 열었다.
"?"
"언니, 이거 음식쓰레기 주고 간 거야?"
캘리포니아롤이 30개는 너끈히 들어갈만한 상자 안에 딱 두 개의 롤이 널브러져 분해되어 있었고 한쪽 구석에는 초밥 하나가 뭉개져 있었다. 이걸 먹으라고? 하... 참...
언니와 나는 기분이 나빠지다 못해 욕이 나올 지경이었다. 당장이라도 원장실에 쫓아 들어가 이게 뭐하시는 거냐고 따져 묻고 싶었지만 우리는 참았다. 그게 예의없다고 느꼈다면 우리에게 이런걸 주지도 않았겠지. 대신 원장실 앞 휴지통에 상자를 활짝 열어 뭉개진 초밥이 그대로 보이도록 쑤셔 넣었다.
그동안 우리는 사비로 사 먹는 간식들을 원장님과 나누어 먹었다. 똑같이 추접한 인간이 되기 싫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날 이후 우리는 간식먹을 때 원장님이 눈앞에 지나가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인간으로서의 기본예절을 지켜줄 필요가 없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언니는 아직도 그대로 그곳에 있다. 남에게 싫은 소리 안 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라 되도록 참는데(조무사 박사님이 이름과 면허를 사칭해도 ㅡ 1화 간호조무사 박사님) 요즘엔 원장님에게 한마디씩 대꾸하며 무작정 참아주지도 않을 뿐더러 이제는 3인이 3인분의 식사를 한다고 한다.
성실하고 조용한 사람의 성격까지 바꿔버리는 참 즐거운 치과생활이다.
사진 출처 : 언스플래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