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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논쟁사

월남 이상재 묘비문 파문

by 별사탕 Jan 31.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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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쟁자: 이상노 대 박응삼     

논쟁자 약력

이상노 : 1916~1973, 언론인, 새교회 신학원 교수, 시인

박응삼 : 1905~1973, 천도교 중앙 총부 교화과장


개요

월남의 서거 30주기인 1957년 6월 28일 고향 양주에 묘비를 건립하였다. 주체는 ‘월남이상재선생묘비건립위원회’였고, 시인 변영로가 짓고 서예가 김충현이 글씨를 썼다. 그런데 하루 전날, 천도교중앙총본부 명의로 한국일보에 공개성명서가 광고로 실렸다. 이 성명서가 지적하는 내용은 크게 세 가지였다.     


1. 월남이 3·1운동의 방법을 지정했다는 내용은 손병희의 3·1운동 3대 원칙을 왜곡한 것이다.

2. ‘월남 이외의 사람들이 한결같이 살육을 주장’했다는 언급은 민족대표를 모욕하는 말이다.

3. ‘의암(손병희)과 함께 모의했다’는 언급은, 당시 두 사람이 상면한 적이 없으므로 거짓이다.    

  

이런 세 가지 문제의 시정을 촉구하였으나, 이상노가 ‘해명’글을 실어 이상재에게 맞추어진 초점은 당시 정황상 여러 간접적 정황의 대표성을 띤 언급이라는 점을 들어 가볍게 취급하였다. 그러나 천도교의 박응삼이 ‘해명에 대한 해명’을 함으로써 반박하였다. 미화되어서는 절대 안 되는 역사 기술의 특성을 거론하며 수긍 불가론을 펴고 있다.      


비문의 내용 : 문제가 되는 주요 부분만 발췌

(전략)

천도교주 의암 손병희 선생과 함께 모의를 거듭하실 때 1)다수인은 한결같이 살육을 주장하였으나 오직 선생만이 살육하나니보다 우리가 죽기로 항거하여 대의를 세움만 같지 못하다고 제의하시었다.

(중략)

이에 대한 독립의 성업을 이루우신 우리의 초대 대통령 우남 리승만선생의 높은 뜻을 받들어 이 비를 세우는 것이다.

(하략)

     

한국일보의 후속보도

-이병헌(천도교중앙총부 부교령) : 없는 사실을 날조하는 것은 선열에 대한 모욕

-최남선 : 손병희와 이상재는 만난 일이 없다.

-이갑성(민족대표 33인 중 1인) : 월남선생을 업적으로 보아 문제삼지 않는 것이 어떨까.

-변영로 : 모처의 요구로 없던 사실이 추가되었다. 비문 건립이 급박하므로 문제 삼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홍식(손자) : 이대통령께서 고증하신 일이다.

    

한국일보(지평선, 27일)

오직 의암의 뜻에 의하여 3·1운동의 방법이 확립된 것이라는 성명서의 주장도 문제가 있다.     


조선일보(만물상, 30일)

3·1운동 당시 모의에 참여하지 않은 ‘이대통령께서 고증하신 것’이라 하여 고증이 확정되는 것이 아니다. (역사적 고증은 역사가 하는 일이지 권력을 가진 개인이 하는 일이 되어서는 안된다 입장)     


경향신문(여적, 30일)

수주(변영로)는 양식있는 문인도 못되고, 대서인만도 못하고, 하라는대로 하는 간판쟁이에 불과하다. 모처에서 분부했다는 그분께 양해를 구하고 비문을 정정하는 것이 수주의 명예를 위해서 좋을 것이다.     


월남선생 碑文異議波紋의 해명(이상노, 신태양, 1957. 8)

수주의 ‘모처’ 운운은 그 모처라는 곳에서 수주의뜻과는 다르게 자의로 내용을 추가 했다는 것이지, 수주 스스로가 대서하듯 써넣었다는 뜻은 아니다. 동학에 뿌리를 둔 천도교의 역사적 투쟁방법은 폭력이었다. 그런 천도교에서 3·1운동의 비폭력주의를 선도했을 가능성은 낮다. 오히려 기독교 정신에 가깝다. 기독교인들이 유약하여 천도교의 손병희를 내세우자는 의견 초기에 이견이 분분하였다.

과거 이용구가 천도교와 관계하였으므로, 부정적으로 보았던 천도교와의 협력이 이상재의 권유로 이루어졌으니, 이상재가 3·1운동 정신과 관계 없다고만 주장할 수 없는 것이다.

이대통령의 고증 첨언을 매천야록적 인식, 춘추필법春秋筆法, 조둔시기군趙盾弑其君적 필법으로 이해된다.         

해명에 대한 나의 해명(박응삼, ‘신태양’ 1957년 9월)

이상노의 해명은 기독교와 천도교를 상극으로 상정하게 하여 서로 대결하게 만드는 국면을 조장하는 측면이 있다. 이는 바람직하지 손병희나 이상재 두분에게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다. 역사의 서술은 사실에 입각하여 기록하는 데 의의가 있는 것이지, 온정이나 미화에 있지 않다.

이상노가 천도교를 향해 천도교가 폭력적이라고 한 말은 임진년 11월 전라도 삼례에서 맨주먹으로 수천명이 시위하였고, 이듬해 2월에는 광화문 대궐 앞에서 삼일 밤낮을 수만명이 엎드려 통곡한 비폭력시위운동의 효시라는 사실을 모르고 하는 말이다. 그릇된 일을 시정하지 않을지언정, 정당화하고 변명할 일은 더더욱 아니다. 이는 ‘不肖而不肯事賢’한 일이다.

    


임정에서 하와이에 이르기까지 이승만의 행적은 자기의 것을 높이기 위해 상대를 비방하여 낮추는 비열한 행태를 보여 왔다. 이 사건도 그 중 하나라고 봄이 좋겠다. 지도자의 잘못된 선택이 그 집단 전체의 대립과 갈등을 초래하여 존폐의 위기에 처하게 만드는 경우에 해당한다. 그럼에도 그 집단이 건재한 이유는 수 많은 광신 맹신에 빠진 생존 개미들이 많기 때문이다.


역사적 사실은 이러하다

이상재는 3·1운동에 직접 간여한 사실은 전혀 없다. 3·1운동 계획 당시 대표단이 일본 정부와 담판을 위한 교섭사를 파견하기로 하고 이상재에게 부탁하였으나 이상재는 거절한 바 있고, 재차 설득하려 했으나 역시 자신은 대표의 한 사람을 희망한다고 말하여 3·1운동 전선에서의 역할을 직접적으로 거절한 이력이 있는 사람이었다.[‘3·1운동과 기독교계’, 김양선, <3·1운동 50주년 기념논집>, 동아일보사편]

     

천도교의 주장이 옳은 것으로 보인다. 비문은 이승만정권으로부터 어용적 영향을 받아(이승만은 이상재의 제자로 이상재가 투옥되었을 때 감옥밖에서 밤샘농성을 하여 석방에 일조한 일이 있고, 이승만이 감옥에 성경을 넣어준 것이 이상재가 기독교로 개종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비문이 터무니 없이 미화된 것으로 보인다. 아무리 좋은 게 좋다는 식의 자화자찬이라 하더라도 사실을 왜곡하는 일을 넘어, 역사를 왜곡한다는 것은 매문을 통해 후세에 도적질하는 법을 가르치는 추악한 일이 아닐 수 없어 재발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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