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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술술이세무사 Dec 12. 2023

세무사 강의 요청

세무사의 하루

"스크린 도어가 열립니다. 발빠짐 주의 발빠짐 주의"


덜컹덜컹


아침부터 지하철에 몸을 싣고 성남시로 가는 길

처음 가는 성남이 이렇게 먼 줄은 몰랐다.

하지만 먼 거리도 동네 뒷산처럼 가깝게 느껴지는 기분

바로 강의 요청 미팅이 있기 때문이다



시간은 일주일 전

병의원 대상으로 영업을 하는 회사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내용인 즉, 사업설명회를 개최하려 하는데 설명회 중 한 꼭지로 세무 강의를 넣을 예정이고 그 강의를 나에게 맡기고 싶다는 것이었다.

강사료가 지급되는 것은 아니지만 설명회 참석자는 대부분 병의원 원장 또는 관계자여서 강의가 잘되면 이를 통한 영업도 가능하고 지속적인 강의 자리도 마련해 주겠다는 것이 제안의 요지였다.


새로 지어지는 상가들을 보면 '병의원 임대환영' 이런 현수막을 많이 볼 수 있다.

병의원이 들어오면 건물의 가치도 올라가고 월세도 밀리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세무업계도 마찬가지로 병의원 거래처는 기장료도 높고 밀리지도 않는 우량거래처이다.

그리고 사실 강의는 강의 자체보다 사람을 모으는 일이 더 어려운데 알아서 사람도 모아준다고 하니 속는 셈 치더라도 손해 볼 것이 없었다.


단, 관련 미팅을 위해서는 편도 2시간 거리 성남에 위치한 회사를 방문해야 했다.


내가 하고 싶다고 먼저 연락한 것도 아니고 상대방이 부탁을 해오는 처지인데 방문도 내가 해야 한다?

그것도 왕복 4시간이 더 걸리는 거리를?

더욱이 방문을 하더라도 강의 확정을 장담할 수 없기에 하루를 통으로 날릴 수 있는 그런 상황


딱히 할 일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전문자격사'로서 상당히 자존심이 상하는 요구였다.


하지만 누가 오고 가든 뭐가 대수랴

새로운 영업 루트가 만들어질지 모를 기회인 것 사실이었다.

잠깐의 고민 후 '알겠다.'는 대답과 함께 전화를 끊었다.


미팅까지 남은 시간은 일주일


전화로 듣진 못했지만 나 말고 다른 세무사와도 미팅을 할 것이 분명해 보였다.

이런 상황에 빈 손으로 가서 입으로만 떠든다면 결과가 좋기는 매우 어려운 법

먼 걸음이 헛걸음이 되지 않기 위해선 철저한 준비가 필요했다.


'만날 때 아예 강의하는 모습까지 보여주면 어떨까?'


상대는 단순히 얼굴만 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로 생각하고 있겠지만 미팅 자리에서 강의자료와 함께 강의능력까지

'준비된 세무사'라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다른 세무사와의 경쟁이 있더라도 확실히 우위에 설  있을 것이다.


'이왕 가기로 한 거 후회 없이 나를 보여주고 오자!'


그동안 만들어둔 강의자료가 몇 개 있었지만 이번 자리는 자영업자의 일반적인 세금이 아닌 병의원에 특화된 강의가 되어야 하기에 새로이 정리가 필요했다

이를 위해 병의원 거래처가 많은 세무사는 물론 세무서의 세무공무원, 세다리 네다리 건너아는 의사들까지 찾아다니며 병의원의 구미가 당길만한 내용을 모았다.

또한 강의 내용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PPT 디자인이다 보니 밤에는 인터넷에 떠도는 여러 디자인을 참고하며 PPT를 다듬고 또 다듬었다.


그렇게 낮에는 내용정리, 밤에는 PPT 디자인으로 주경야독한 날들이 지나고

어느새 미팅 전날 밤

드디어 7년 차 세무사의 정수를 녹여낸 강의자료 완성됐다.



지하철에서 내려 버스로 갈아타고

약속 시간인 오전 11시를 2분 넘긴 11시 2분, 지식산업센터에 위치한 회사 문 앞에 도착했다.

때마침 울리는 전화벨소리, 회사 이사님의 전화다.



"안녕하세요 술술이 세무사입니다. 방금 도착했습니다."


"네~ 곧 나가겠습니다."



잠시 후 마중 나온 이사님과 함께 회의실로 들어갔고 곧이 부사장님 두 분이 더 도착해  분 모였다.

서로 간 가벼운 자기소개 후 부사장님 한 분의 주도로 회사 소개가 이어졌다.


회사는 늦어도 내년에는 상장하는 것을 목표로 계획한 것들을 하나하나 진행 중이라는 이야기.


만나기 전에 검색으로 회사에 대해 대충은 알고 있었지만 상장 계획은 몰랐기에 규모가  꽤나 놀라웠.

그런데 그런 큰 회사가 왜 하필 서울 변두리에 있는 나를?



"병의원 전문 세무법인도 많은데, 어떻게 저한테 연락을 주셨을까요?"



회사소개가 끝나고 나니 첫 전화통화부터 든 궁금증을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세무사님 블로그를 보니 병의원 관리나 학회 쪽으로 일을 오래 해오신 것 같아 한 번 말씀을 나누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저희는 규모보다는 내실 있는 분과 함께 하고 싶습니다."



세무법인 근무당시 병의원 관리 내용이나 학회 자문이력 등을 블로그에 적어두었는데 그것을 좋게 본 모양이다.



"다른 세무님들과도 미팅을 하셨을까요?"


"네, 저희 일을 봐주시는 회계법인 회계사님도 있고, 소개를 다른 세무사님도 만나 뵙고 했지만, 강사로서는 부족함을 많이 느꼈습니다. 그런데 세무사님은 강의 경험도 있으신 것 같더라구요."



능력 있는 강사에 목이 마른 상황

준비해 온 강의자료를 생각하니 저 멀리 승리의 여신이 옅은 미소를 짓고 있는 것 같다.

이제 그 미소를 함박웃음으로 바꿀 차례



"알겠습니다. 이번 미팅 때 그냥 뵙기는 그래서 자료를 만들어왔는데 보여드려도 괜찮을까요?"


"좋습니다."



7년 차 세무사의 인생을 담아낸 강의자료

수십 번은 한 강의 예행연습

드디어 그것을 보여줄 시간이다.


적절한 아이컨텍과 중간중간 웃음 포인트로 청중의 집중을 유지시키고

일방적으로 듣기만 하는 강의가 아닌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내용으로

자칫 어렵고 지루한 세금강의가 될 수 있었겠지만 술술이 세무사는 확실히 달랐다.

그렇게 물 흐르듯 끝나버린 강의


세 분은 나의 내공에 짐짓 놀란 모양이다.



"말씀 잘 들었습니다. 실무적으로 알고 계신 내용이 굉장히 많네요."


"강의 준비도 많이 하셨네요."


기립박수까지는 아니었지만 여기저기서 터지는 호평들

'이건 빙산의 일각입니다.'라는 말은 꾹 누르고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그러면 다음 달에 강의 일정 괜찮으실까요?"


나이쓰!!!!

하지만 뜸 들이지 않고 덥석 문다면 면이 서지 않는 법



"날짜는 상관없는데 시간대랑 요일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평일 오후 6시 이후 아마 7시부터~9시 사이가 될 것 같습니다."


"성남에서 하지는 않으시죠?"


"오시기 머셨죠? 설명회는 강남에서 할 예정입니다."


"알겠습니다. 제가 하고 싶습니다."



1시간 30분이 걸린 미팅이 끝나고 이사님이 챙겨주신 회사 제품을 든 채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지금 머릿속에 드는 생각은 하나


해냈다.




후기


망했다.

그날  위 회사로부터 연락은 없었습니다.

미팅을 마치고서는 '해냈다.'는 생각에 온몸 구석구석 도파민이 흘러넘쳤고 

다음 달에 강의 일정이 잡혔다고 이곳저곳에 자랑도 했는데..


해낸 것이 아니라 '망했다.'는 것을 알게 되니 창피함에 몸 둘 바를 몰랐던 기억이 납니다.


말실수를 했나?

너무 변두리 비주류 세무사임을 강조했나?

선택되지 못한 아쉬움에 한동안은 무슨 실수가 있었는지 되짚어 보기도 했습니다.

일주일 동안 정말 열심히 준비했는데 말이죠 ㅠㅠ


다만 결과는 부끄러울지언정

준비한 과정만큼은 어디에도 자신 있게 내놓을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이상 결과보다 과정을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술술이 세무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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