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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마토 Sep 04. 2024

상실

인간사는 누구도 알 수 없다

리즈는 다시 바쁜 일상으로 돌아갔다. 일하고 일하고 쉬는 날은 밀린 집안일을 해치워야 하는 그런 반복되는 일상을 살아가며 여름을 다 지나 보낸다. 가을이 오고 있었고 산골에 처음 이사 와서 느낀 주변의 알록달록 물든 나뭇잎들이 점점 더 가을이 깊어짐을 보여주고 있다. 여전히 트리시와는 가족같이 잘 지낸다. 이제는 서로 문자를 주고받으며 서로를 응원하기 시작했다. 트리시는 가끔씩 리즈의 페이스 북에 들어와서 댓글을 달기도 하며 그녀의 삶을 많이 지지해 주는 열혈팬이기도 하다. 이렇게 서로를 의지하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정말 아무 걱정이 없는 듯이 보였다. 리즈는 인생이 이렇게도 평온할 수 있는지 의심이 생기기도 하였다.


트리시는 리즈와 시간이 날 때마다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둘째 아들 보이드가 딸을 곧 출산할 예정이라며 기뻐하기도 했다. 그 아이를 위해 그동안 모아두었던 보이드의 배냇 저고리와 아기 옷들을 깨끗하게 빨아서 선물해 주고 싶어 했다. 햇볕에 말리는 아기의 옷은 모두 새 옷처럼 잘 보관되어 있어서 순백의 색깔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리즈는 너무나 놀랐다. 대부분의 하얀 옷들은 오래 보관하면 누렇게 색깔이 바래기 일수였기 때문에 트리시의 청결함에 무척 감탄했다.  할머니가 될 준비를 하며 트리시는 행복해했고  태어날 아기를 곧 만나기를 원했다. 트리시는 리즈에게 가끔씩 머리가 아파서 잠을 이루기가 힘들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두통의 정도가 얼마나 심한지 알지 못했던 리즈는 걱정은 되었지만 다음날에는 또 아무렇지도 않은 트리시의 모습을 보면서 안심이 되었다.


가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우수수 나뭇잎이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겨울로 접어들었다. 이곳은 겨울에 눈이 오지는 않지만 집안에 난방을 할 수 없으므로 집안이 얼음장처럼 추웠다. 집에서도 두꺼운 외투와 입김이 나올 정도이다. 요리를 하기 위해 무언가를 가스레인지 위에서 끓이면 좀 따스한 기운이 들어서 낫기는 하다. 온돌방 문화에 익숙한 한국 사람들은 이런 추위에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는다. 따뜻한 아랫목에 누워서 이불을 덮고 누워서 한숨 자면 정말 좋겠다는 바람이 있을 뿐이다. 트리시의 대 저택은 사람이라고는 그녀 혼자이기 때문에 더욱 추웠다. 그녀의 거실에 사다 놓은 전기 벽난로는 넓은 거실을 다 덥히지 못했다. 그야말로 모양만 따뜻해 보이지 실질적으로 온도를 덥혀주지는 못했다. 그해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이러다가 눈이 오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차가운 바람이 옷 속으로 파고들었다. 밖에서도 춥고 집 안에서도 추워 날들의 연속이었다.


따뜻한 국물 요리가 간절한 어느 아침. 리즈는 정성스럽게 소고기를 듬뿍 넣은 미역국을 끓였다. 몸이 추울 때 미역국은 아주 좋은 음식이다. 먹고 나면 따뜻한 체온이 느껴지면서 피로도 풀리는 듯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리즈는 미역국에 대한 추억이 많아서 먹으면서 옛날 생각을 할 수 있어서 더욱 좋아했다. 트리시를 위해서 조금 떨 짜게 만들어 쟁반에 밥과 미역국 그리고 몇 가지 반찬을 담아서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이른 시간이었지만 아무리 트리시의 집 문을 두드려도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의 차고 쪽으로 걸어가 보았다. 차고가 비어있다. 트리시는 아침부터 외출을 한 것이다. 흔한 일은 아니다. 어디 급하게 장을 보러 간 것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준비했던 음식을 다시 집으로 가져온 리즈는 혼자서 미역국으로 아침밥을 먹기 시작한다.

오랜만에 먹으니 그 맛이 좋았다. 고기도 야들야들하게 잘 익어서 미역과 고기를 잔뜩 넣은 미역국 그릇이 금세 비었다. 국물까지 말끔히 먹은 리즈는 트리시가 아직 먹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그녀도 분명 좋아했을 텐데.


한 낮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밖은 칼바람이 분다. 외출을 해볼까 생각했던 리즈는 그냥 집에 머물기로 마음을 바꾼다. 여전히 구름이 잔뜩 끼어 어두컴컴하고 한 낮이지만 우중충한 날씨이다. 이런 날은 집에 가만히 있는 것이 좋다. 점심때가 지났는데도 트리시는 집에 돌아오지 않고 있다. 보통은 멀리 차를 몰고 외출하는 경우에는 차고문을 닫고 나가는 그녀였다. 무언가 이상했다. 리즈는 그녀에게 전화를 해본다. 전화기는 꺼져있다.

지금 보니 집안의 불은 환하게 켜져 있다. 빨리 그녀가 집으로 돌아와 주기를 바라본다. 그때 문자 한 통이 리즈의 전화기에서 울렸다. 트리시의 조카 조시에게서 온 문자였다


무슨 일이지?라는 생각을 하며 문자 메시지를 읽는다.

'리즈, 잘 들어. 우리 고모 트리시가 아침에 털신을 사려고 신발 가게에 가셨어 그곳에서 신발을 고르다가 갑자기 쓰러지셨어. 신발가게 주인이 너무 놀라서 구급차를 불러서 병원에 가셨대........ 그런데 의식이 없으셔. 의사는 트리시가 뇌졸중이라고 했어. 다시 깨어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구나. 집안에 강아지 보비가 혼자 떨고 있을 거야 그 아이가 잘 있는지 네가 확인해 주겠니? '

리즈는 그 문자를 보고 너무나 당황해서 답장하는 것도 잊으채 트리시의 집으로 뛰어갔다.

보비를 부르며 그녀의 집 문을 열려고 손잡이를 돌려 보았지만 굳게 닫혀있었다. 집밖으로 연결되는 모든 문을 확인해 보았지만 모두 잠겨있었다.

마지막으로 지하실과 통하는 문 손잡이를 돌려보았다. 부드럽게 돌아갔다.

문을 열고 그녀의 집으로 들어갔다.

보비의 이름을 부르며 온 집안을 돌아다녔다.

보비는 트리시의 침실 앞에서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리즈는 우선 보비에게 물을 주었다.

아까  답장을 보내지 않은 것에 화들짝 놀라서 조시에게 문자를 보낸다

'보비를 찾았어요. 우리 집에 데려가 있을까요?'

다시 조시에게서 문자가 온다

'아니야 리즈. 보비는 차고에 두고 차고 문을 닫아줄래? 그리고 지금 병원으로 바로 와줘야겠어. 아무래도 트리시와 작별인사를 해야 할 것 같구나'

작별인사라고? 리즈는 믿을 수가 없었다.

어제까지 차를 마시며 즐겁게 대화를 나누었고 두통이 있다고는 했지만 아주 가끔씩이었다.

리즈는 생각했다 '아니 믿을 수 없어. 직접 봐야겠어.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금방 떠날 수가 있어'


리즈는 차를 몰고 대학병원으로 향했다. 그곳에 도착했을 때 트리시의 아들들 루크와 보이드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리즈에게 와줘서 고맙다고 말하며 그녀가 있는 병실 방으로 리즈를 데리고 갔다. 여러 가지 슬라이드 문을 전자키를 이용해서 열고 들어갔다. 중환자 실이 나왔고 그곳에 트리시가 누워있다고 했다.

그녀가 있는 병실로 향한다. 리즈는 두려웠다. 드라마에서만 보았지 산소호흡기를 끼고 여러 가지 관이 연결되어 있는 장면을 처음 보았다. 트리시는 잠자고 있는 듯 보였다. 화장을 곱게 하고 있었고 피부에는 결점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평온하게 눈을 감고 있는 트리시의 곁으로 다가가 손을  잡아보았다. 아직도 따듯했다.

이런 트리시가 왜 떠나야 한다는 말인가!

눈물이 앞을 가렸다. 그녀와의 시간들이 너무 생생하게 기억이 나서 이렇게 잠들어 있는 트리시가 아직도 믿어지지 않았다.

의사는 말했다.

"트리시는 회생 불가능합니다. 이 산소 호흡기를 떼는 순간 그녀는 사망하게 됩니다. 생전에 그녀가 변호사를 통해서 연명치료는 하지 않겠다는 문서를 작성해 놓았기 때문에 그녀의 요청에 따라 오늘 밤 그녀를 보내드리려고 합니다.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은 한 명씩 작별인사를 하시기 바랍니다. 시간은 얼마든지 드릴 테니 천천히 트리시를 보내 드리세요"

'작별인사라니 오늘 밤에 떠나신다니' 리즈는 아주 오랫동안 트리시와 살고 싶었다. 그리고 그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녀는 누구보다 건강했고 활기찬 삶을 살고 있었으니까.

힘든 타국생활에 누구보다도 힘이 되어주던 리즈의 조력자였다.

그녀가 없는 삶을 상상조차 안 하고 있었던 리즈에게는 커다란 충격 그 자체이다.

하지만 의사는 작별인사를 하라고 한다.

짧은 시간만이 남아 있다

리즈는 다시 트리시의 손을 잡고 말한다

"감사했어요 트리시. 당신은 나의 마음속 엄마예요. 사랑해요. 언제까지나 잊지 않을게요. 먼 곳에 가서도 잘 지내세요. 이젠 외롭지 않으셨으면 해요"

루크와 보이드도 눈물을 흘리며 엄마와의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그렇게 우리 모두는 트리시와 헤어졌다. 너무나 허무하게.


집으로 돌아온 리즈는 텅 빈 산골에 혼자 덩그러니 남아 있는 것 같아서 더욱 외로웠다. 그동안 트리시가 저 큰집에서 환하게 빛을 밝혀주고 있어서 이곳이 이토록 외진 산골 마을이라는 것을 느끼지 못했다.

믿기지 않았고 의욕이 없어졌다. 때때로 눈물샘이 고장 난 것처럼 눈물이 흘렀다.

트리시는 이제 떠나고 없다.

민들레 꽃처럼 사라졌다.

사람의 인생이 이토록 허무하게 끝나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슬픔도 지나고 나면 인이 박혀서 무뎌지겠지.

자꾸 트리시와의 아름다웠던 추억들이 떠올라 더욱 그녀가 그리워진다

아름다운 사람

고마운 사람

닮고 싶었던 사람

그게 바로 트리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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