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선언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발견되는 것이며, 늘 논쟁의 대상이다.”
역사학도 출신으로 오랫동안 미국 패권 운영에 관여한 대전략가 헨리 키신저가 말한 '역사의 의미'다.
마지막 2개 장에서는 미중 패권전쟁 관련 역사에서 발견한 2개 사항을 정리하며 글을 마무리하련다. 세간의 주 관심사는 ①미중 패권전쟁의 원인·본질은? ②역사의 시간은 어느 편인가? 의 문제가 아닌가싶다.
결론은 역사를 읽어보니, 미중 패권전쟁은 투퀴디데스 함정 때문이 아니라 서로 다른 문명에 따른 충돌이다. 그 상황에서 서구·미국의 시대가 가고, 21세기 중국·아시아 시대가 오고 있다는 것이다.
□ 패권전쟁 이해를 위한 렌즈·프레임은?
2018년 시작된 미중 패권전쟁의 기원은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실패로 인한 미국의 대침체·쇠락이다. 전쟁은 국제관계의 세력 판도가 흔들리면서 시작되었다. 미국이 쇠락하고 중국이 부상, 양국 간의 국력 차가 감소하고 중국의 생각이 달라지면서 발발한 것이다.
이 같은 미중 패권전쟁을 이해하는데 좋은 렌즈는 과연 앨리슨이 제시한 ‘투퀴디데스 함정’인가? 앨리슨은 미중 패권전쟁의 불씨는 중국의 급부상에 대한 미국의 두려움이라고 주장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미중 패권전쟁 초기 상황을 이해하는 렌즈로는 쓸만하다.
그러나 전쟁이 5년 지난 시점에, 특히 세계사적인 미중 패권전쟁을 설명하는 프레임 렌즈로는 뭔가 부족하다. 고대 그리스의 조그마한 도시국가(police) 간의 내전인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동서양의 끝판왕들인 미중 패권전쟁의 패러다임을 도출하는 것도 무리다.
그렇다면 미중 패권전쟁과 함께 이 전쟁이 야기하는 21세기 초 세계사적인 정세의 변화를 이해하는데 보다 적실하고 유용한 패러다임이나 의미 있는 렌즈는 뭘까? 그것은 헌팅턴이 말하는 '문명충돌론'일 것이다.
과거 전통시대의 패권경쟁은 기존의 패권국과 도전하는 부상국이 서로를 적으로 규정하고 패권 획득을 목적으로 전면전을 벌이는 것이었다. 그러나 핵(核)이라는 공멸 수단이 보편화된 오늘날에는 과거와 같은 방식이 아닌 새로운 형태의 대결로 진화하고 있다. 세계의 정치ㆍ경제적 지배권을 둘러싼 ‘규범과 질서의 패권전쟁’이 그것이다.
□ 미중 간의 규범·질서 전쟁은 문명충돌
미중관계의 대변화 국면에서 미국 등 서구가 중국과 갈등을 빚는 건 무엇보다 체제의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데 따른 적대감 때문이다. 서구 사회는 중국의 굴기와 도전을 충격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인정조차 하지 않으려 한다. 특히 자신들의 정치적·문명적 성취를 거의 종교적인 열정으로 받드는 미국은 자국이 중국을 일방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한편, 우크라이나 전쟁은 사실상 미국·유럽 등 민주진영과 러시아 간의 대결이다. 미국에 대항해 중국과 러시아가 협력하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 등 서구문명과 다른 이슬람의 중동이 중국 편에 가세하기 시작했다. 이스라엘과 이슬람 무장단체 하마스 간의 무력충돌도 비슷한 양상이다. 서구는 300여 년 만에 처음으로 유럽 이외의 강력한 이민족을 상대로 단결하고 있다. 비서구 또한 이전 같지 않은 정치적 각성을 바탕으로 움직임이고 있다.
이런 상황의 세계정세 변화를 이해하는데 유용한 렌즈는 두말할 것 없이 ‘투퀴디데스 함정’이 아닌 ‘문명충돌’이란 패러다임이다. 2023년도에 본격화한 중국과 중동국가들과의 밀착, 특히 페트로 달러의 균열 조짐은 새로운 문명충돌의 서막이 될 수 있다.
이슬람의 중동과 미국의 앞마당인 중남미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은 문명충돌의 본격화 신호이다. 세계는 서구(30%)와 비서구(70%)로 나눠지고 있다. 중국은 유라시아 대륙은 물론 중동과 중남미, 아프리카를 장악해 가고 있다. 마치 로마 제국 말기에 나타난 수많은 이민족들의 저항과도 같은 형상이다.
□ 전쟁의 양상은 문명충돌론의 현실화
문명충돌은 문명에 의한 새로운 전쟁을 의미한다. 진행 중인 미중 패권전쟁은 갈수록 헌팅턴이 예언한 문명충돌의 모습이다.
탈냉전 직후인 1993년, 사무엘 헌팅턴은 『문명의 충돌』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새로운 세계에서는 문화적 동질성이 한 나라의 우방과 적국을 규정하는 본질적 요인이다. 한 나라의 문화적 정체성이 세계정치에서 그 나라가 차지하는 위치, 그 나라의 친구와 적수를 규정한다. 탈냉전 시대에는 지금까지 부상하지 않고 있던 정치·경제 외적 가치인 역사나 언어·종교 같은 문명적 요소와 그 충돌이 세계를 움직이는 핵심 변수가 된다.”
헌팅턴은 서구 문명에 대한 이슬람 문명과 중화문명의 도전을 위협으로 기술하고 있다. “서구는 도전의식이 강한 이슬람 문명, 중국 문명에 대해서는 늘 긴장감을 느끼며 이들과의 관계는 적대적이다. 이슬람과 중국은 판이한 문화적 전통을 가지고 있지만 둘 다 서구에 대해 우월감을 가지고 있다. 이 두 문명의 실력· 자긍심은 서구와의 관계에서 나날이 늘어나고 있다. 가치관과 이익을 둘러싼 서구와의 충돌 역시 다양하게 심화되고 있다.” 헌팅턴의 30년 전의 예언이 적중하고 있다.
실제로 미중 패권전쟁 과정에서 나타난 제반 현상은 미중전쟁이 서로 다른 문명, 이념 간의 전쟁임을 확인해주고 있다. 미중 전쟁은 힘의 경쟁뿐만 아니라 양국의 정체성이 자리 잡고 있는 규범경쟁·문명경쟁이다.
미중 무역전쟁 직전인 2017년 말, 미국의 대중국 전략 보고서는 중국을 경쟁자·수정주의자· 도전자로 표현했다. 중국과의 경쟁을 장기적인 것으로 보고, 중국의 부상을 미소 냉전 시기의 이념적 경쟁과 유사하게 ‘우리의 가치에 대한 도전’으로 보기 시작했다. 미국과 중국의 전략적 경쟁을 사회주의(권위주의) 대 민주주의라는 이념과 체제 대립으로 이해한 것이다.
그 연장선에서 미국은 시진핑을 중국을 대표하는 국가주석보다는 공산당의 최고지도자인 총서기(General Secretary)로 표기하고, 공산당의 붕괴를 우선적인 전략목표로 삼고 있다. 중국 공산당이 인간의 생명과 자유, 행복추구라는 미국의 절대적 신념과 양보할 수 없는 인권의 가치에 도전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의 패권 전략을 주무르던 스키너 미국 국무부 정책기획국장은 2019년 4월 한 포럼에서 “중국과의 라이벌 관계는 미국이 이전에 겪지 않았던 다른 문명, 다른 이데올로기와의 싸움이다. 중국의 체제는 서구의 철학과 역사에서 탄생한 게 아니다. 미국 역사에서 백인이 아닌 대단한 경쟁자를 만난 것은 사상 처음”이라면서 미중관계를 ‘문명충돌’의 관점에서 바라보았다.
미국이 중국과의 체제·이념 대결을 강화하며, 시진핑 정권의 붕괴를 추구하는 것은 한편으로 미국식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체제의 위기의식을 반영하는 것이다. 어쩌면 역사는 현재와 같은 기능부전의 미국 민주주의를 그리스 아테네 제국 말기 전쟁의 파멸을 초래한 최악의 민주정에 대한 평가와 같이 냉정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