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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니치 Mar 13. 2024

19세기말에 잘못 끼워진 첫 단추


필자의 『제1~4권』 시리즈 글들은 미중 패권전쟁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함이다. 지난 2023년 10월 19일부터 금년 2월 14일까지 쓴 제1, 2권의 글들은 패권 관련 역사와 현재를 토대로 미래를 전망한 것이었다. 1개월의 휴식·충전을 거쳐 다시 시작하는 제3권의 글은 전쟁 당사자인 미국·중국과 우리 자신에 대한 지피지기(知彼知己)다.

      

손자병법의 모공편(謨攻篇)에 나온 지피지기는 “적과 나의 형편을 잘 알면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는 것이다. 미국·중국이 우리의 적은 아니지만 국제사회는 영원한 동지도, 영원한 적도 없다. 국익만이 영원하다. 우리의 국익·운명을 좌우하는 그들과 우리 자신을 자세하게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의미있는 지피지기에는 두려움 없는 ‘파레시아(Parrhesia)’가 필수적이다.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고, 어리석은 선택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먼저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살펴야 한다. 역사는 지식의 보고이고, 현재와 미래를 비춰주는 거울이기 때문이다. 나라의 정체성과 사고방식, 행동양식을 결정하는 역사를 알면 지식이 배가 된다.               


1. 19세기말에 잘못 끼워진 첫 단추

-  청의 ‘조선책략(聯美)’ 결과는 일제의 조선 식민지배  

        

청의 ‘조선책략(연미)’의 실체


1882년 중국(청)의 주선으로 조선과 미국이 수교한 후부터 한반도 운명은 직·간접적으로 미국과 중국의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미국과 중국은 한반도 국가의 국치와 일제 식민지배, 분단·전쟁 과정에서 협력·적대, 갈등·대립을 반복해 왔다.    

        

미국과 중국이 한반도 문제와 관련해 협력한 최초의 사례는 구한말 미국과 조선의 수교다. 이때 중국(청)은 미국의 한반도 진출을 적극 지원한다. 조선이 구미 제국과 맺은 최초의 쌍무조약을 미국과 맺게 된 데에는 당시 급속히 몰락하고 있던 청나라의 대조선 책략이 주효했다.      


19세기말, 조선왕조 말기부터 대한제국 멸망 시까지는 전 세계적인 격변기였다. 동아시아는 서구 열강들이 주도하는 국제질서의 확장과 청의 조공체제 약화 등으로 요동쳤다. 청의 중화질서 종주국 지위는 약화되었다. 동북아 질서는 일본·러시아 양강 구도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일본이 지역 패권국으로 부상했다.   

       

조선의 내정은 취약했다. 고종의 안중에는 자신의  안위와 호사뿐이었다. 무능하고, 부패했으며, 특히 매국적이었다. 리더십 분열과 학정·부패, 국가경제 파탄에 따라 민심은 이반되었다. 조정은 왕권의 보호·유지에 초점을 두고, 안보는 등한시하며, 내우외환을 외세로 해결하려 했다. 외세는 조선의 생존·자주독립보다 자신들의 세력권 구축과 지정학적 이익 실현에 주력했다. 조선의 명운은 급변했다.          

 

1876년 일제에 문호를 개방한 조선은 1882년 임오군란을 계기로 멸망의 길에 접어든다. 청군과 일본군이 한반도에 진입해 외세가 내정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청의 리홍장은 조선을 식민지화해 서구 열강과 동동한 제국적 지위를 확보코자 했다. 경쟁국 일본은 청과 조선의 종속관계를 단절시켜 조선을 외교적으로 이용하려 했다. 조선은 식민지 쟁탈의 표적이 되어 열강들의 흥정의 수단이나 대상이 되었다.  

         

청의 ‘조선책략’은 조선의 속국화·연미책

  

종주국 청나라가 흔들리자 중국과 일본, 러시아 3국 간에는 조선의 지배권을 둘러싼 주도권 경쟁이 치열해졌다. 쇠망하던 청은 마지막 조공국인 조선의 속국화를 통해 일본과 러시아의 중국 진출을 한반도에서 저지하려 했다. 역부족이었다.        

   

최후의 대안은 자국의 ‘원교근공(遠交近攻)’ 전략을 조선에 강요하는 것이었다. 한반도에 미국을 끌어들여 러시아의 남진과 일본의 조선침략을 견제하는 연미론(聯美論)이 그것이다. 청은 조선에 대한 영토 야욕이 있는 이웃 러시아·일본보다 먼 나라인 미국의 한반도 지배가 자국의 안전에 이롭다고 판단했다.

          

조미수교를 위한 통상조약의 협상부터 완성까지의 전 과정은 중국이 개입·주도했다. 1880년 청나라는 조선의 고종이 일본에 수신사로 보낸 김홍집 일행에게 주일대사관 참사인 황준헌으로 하여금 청의 대 조선 전략인 『조선책략』을 설명토록 했다.           


그 핵심 내용은 중국이 러시아의 남진을 방어하기 위해 필요한 조선의 외교정책이었다. 황준헌은 탐욕스러운 러시아가 조선까지 탐낸다고 강조하면서, 조선이 이를 방어하기 위한 책략은 친중국(親中國), 결일본(結日本), 연미국(聯美國)해 자강을 도모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조선은 중국과 친하게 지내고, 일본과는 관계를 연결·유지하며, 미국과는 강력한 연계를 유지하는 것이 상책이라는 것이었다.

         

황준헌은 연미론을 설파하면서 조선의 수신사들에게 대 미국 사대주의를 주입시켰다. “아름다운 나라 미국(美國)은 남의 인민을 탐내지 않고, 굳이 남의 정사에 간여하려고 하지 않으며, 특히 대통령이 통치하는 미국은 영토를 다른 나라로 확장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후 고종은 조선을 구해줄 나라는 미국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조선에게 영토에 관심이 없는 선한 나라’인 미국은 청나라 북양대신 이홍장의 거중조정을 통해 1882년 조선과 ‘조미통상우호조약’을 체결한다. 동 조약 제1조는 “만약 당사국이 다른 나라에 의해 불의한 또는 억압적(不公輕侮)인 일을 당할 경우 다른 당사국은 거중 조정을 통해 우호적인 해결을 가져오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 청의 조선책략(연미) 결과는 일제 식민지배   

       

구한말은 조선을 침략·약탈하기 위해 서양 세력이 침투하던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대였다. 탈아입구(脫亞入歐)를 열망하던 일본 역시 조선을 향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조선에게 미국은 서구 열강과는 다른 나라로 인식되었다. 조미수교 후 미국은 조선에 총칼 대신 선교사를 보내고, 의료와 교육(선교병원 광혜원, 세브란스 의학교, 배재학당 등 설립)을 앞세우며 평화를 추구하는 나라로 보이게 했다.

          

그러나 1882년 조미수교 후 미국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조선은  “이 세상에서 가장 무능하고 부패한 나라, 교육받지 못한 무지한 나라”였다. 조선에 대한 그의 인식은 주 조선 미국공사관의 각종 보고서들을 통해 얻은 것이었다. 그는 일본이 조선을 차지하는 것을 보고 싶었다. 일본의 조선 합방이 실현되면, 조선인을 위해서나 극동의 평화를 위해서나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에게 한국인들의 역사나 비애는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조선은 그런 미국을 철석같이 믿고 일본의 침탈을 저지코자 했다. 고종은 미국과 일본, 영국이 3국 해양동맹 관계에서 의기투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리가 없었다.       

    

미국의 배신인가?, 고종의 망상인가?   

       

사실, 당시의 미국은 다른 나라에 비해 조선에 우호적이었다. 중국 청나라나 일본, 일본과 경쟁을 벌이는 러시아에 비해 조선에 대한 야심을 내비치지 않았다. 미국은 지리적으로나 역사적·문화적으로도 먼 나라였다. 경제는 세계 제1 대국이었으나 아직 패권을 휘두르는 국가는 아니었다.           


조선의 고종은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 후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러시아 공관으로 임시 피신(1896년 아관파천)했다. 조선은 이후 몰려오는 서구 열강들 사이에서 미국이 동아시아 세력균형의 조정자 역할을 해 줄 것으로 기대했다. 고종은 조미통상우호조약 제1조를 상호방위 조약으로 해석, 미국이 조선을 지켜줄 것으로 기대했다.  

    

조선의 조정은 밀려오는 서구 열강에 저항할 의지와 능력이 전혀 없었다. 당시 주 조선 미국공사관 공사였던 호러스 알렌의 눈에 고종 황제는 "이 나라에 끔찍한 해충이며 저주다. 로마를 불태우며 놀아난 네로와 같았다." 매관매직하며 호사를 누리는 고종을 좋게 볼 리 없었다.


실망한 민초들은 봉기했다. 1894년 봄의 동학혁명과 그로 인해 조선 땅에서 전개된 청일전쟁은 중국 중심의 기존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해체한다. 동아시아는 급속히 일본 중심의 질서로 재편돼 갔다.

          

미국도 1898년 미-스페인 전쟁에서 괌과 필리핀을 장악한 뒤 생각이 달라졌다. 미국은 아시아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관계를 갖게 되었다. 다른 열강들이 그랬던 것처럼 미국은 아시아에 대한 영향력 확대를 꾀하기 시작했다. 1900년에는 중국 청나라에서 일어난 의화단운동 진압을 위한 연합군 일원으로 중국에도 진출한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가 기정사실화되자 고종은 급해졌다. 7월 6일 고종은 루스벨트에게 밀서를 보낸다. “조선의 주권이 일본에 의해 침해되지 않도록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밀서는 조미수호통상조약 제1조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때 미국은 조선을 버린 상태였다. 미국은 청일전쟁과 영일동맹, 러일전쟁을 거치는 동안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일본에 맡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20세기 초 영국을 제치고 사실상 세계 최대의 강대국이 된 미국의 힘을 의식하고 있었다. 미국이 가진 힘의 영향력을 세계에 인식시키는 것이 미국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그 연장선상에서 루스벨트는 도덕적 권위로서가 아니라 ‘세력균형’에 입각한 국익 차원의 대외관계를 구축하려 했다.

        

그는 우선 극동 지역에서 팽창하려는 러시아를 일본을 통해 견제하려는 전략을 수립했다. 러시아의 세력 확장을 억제할 지역인 조선을 일본에 합방시켜 러시아에 대항케 하는 세력균형론이 그것이다. 러시아의 팽창을 저지하려는 미국의 전략에는 일본과 동맹을 체결한 영국이 적극 동조했다. 결국 일본과 러시아 간의 극동지역 패권전쟁(1904-1905 러일전쟁)에서 일본은 미국과 영국의 지원에 힘입어 승리한다. 각축장인 조선이 일본에  넘어간 것이다.  

         

여기에는 미국의 또 다른 전략이 숨어있었다. 당시 필리핀을 점령하고 있던 미국은 욱일승천하는 일본이 필리핀에 대한 야욕을 드러낼 것을 우려했다. 한국문제를 포함한 극동문제나 미국의 필리핀 영유권 문제에서 일본과의 협조가 불가피하다고 생각했다.


그 결과가 일본과 체결한  ‘가츠라-태프트 밀약’이다. 미국은 이를 통해 일본에게 조선이란 먹잇감을 주면서 일본의 관심을 만주로 향하게 해 태평양을 눈독 들이지 않게 했다. 또 극동과 중국대륙을 두고 일본과 러시아가 대립하도록 했다.

         

우리가 몰랐던 ‘루트-다카히라 협정’

         

1905년 7월 29일, 미국은 일본과 ‘가츠라-테프트 밀약’을 체결한다. 미국이 일본의 조선 지배를 합법화해 준 것이다. 1905년 8월 12일 영국과 일본은 2차 영일동맹을 체결하고, 1905년 9월 5일에는 미국의 주선으로 미국의 포츠머스에서 러일 강화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들은 모두 조선에 대한 일본의 보호조치권을 보장했다. 일본의 한국 강점을 지원한 미국은 1905년 11월 을사늑약 체결 직후 주한 미국공사관을 철수한다.


을사늑약은 미일영 3국의 합작품이었다. 미국과 영국, 일본은 3국 동맹을 맺고 미국은 필리핀, 영국은 인도, 일본은 조선을 각각 차지하기로 했다. 이를 적극 지원하며 주도한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은 특히 조선을 일본에 넘겨주고 동양 평화에 기여했다는 구실로 1906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다.   

        

조선은 미일영 해양제국의 합작과 고종을 위시한 위정자들의 사대의존, 무능력으로 일본의 ‘보호’를 받는 신세가 된다. 1905년 을사조약 직전, 조선 고종의 최측근 이용익과 영국의 기자 메켄지 간의 대화를 보자.

          

- 이용익: 미국과 유럽이 조선의 독립을 보장하기로 했다.

- 메켄지: 국력의 뒷받침 없는 조약은 쓸모가 없다. 당신들이 자신을 보호하지 않는데 남이 보호해 줄 까닭이 있는가?

- 이용익: 미국이 약속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미국은 우리 친구가 될 것이다. 


미국은 1908년 11월 30일에 일본과 ‘루트-다카히라 협정’을 체결해 일본의 조선합병을 외교적으로 완결했다. 그동안 우리가 잘 몰랐던 이 협정은 ①태평양 지역에서 양국의 현상 유지  ②상호 간의 영토(조선·만주는 일본권역, 필리핀은 미국권역) 존중 ③청나라의 독립과 상업상의 기회균등 존중 등을 상호 확인·합의하고 이를 만천하에 공개한 것이었다. 1910년 8월 29일, 조선은 500년 왕조가 멸망하고 일본의 식민지가 된다.

         

□ 잘못 끼운 첫 단추는 중국(청)의 망상과 미일의 합작품

          

미국이 조선을 지켜줄 것이라는 환상은 조선 위정자들의 무지와 무력, 사대주의가 초래한 망상이었다. 미국은 조미통상우호조약 상의 거중조정 조항이 의무적인 것이 아니라면서 조선과 열강 간의 갈등에 중립을 지켰다. 미국을 연루시키려는 조선의 노력은 미국에 의해 방기 돼 실패한 것이다.

            

사실 조미통상조약은 공약(空約)에 불과했다. 특히 청과 조선이 추구한 전근대적인 ‘원교근공’ 전략은 해양세력과 대륙세력 간의 경쟁구도로 변화한 당시의 시대상황에 걸맞지 않은 것이었다. 미국은 일본과 한 편으로 이익을 나누지 중국 대륙세력의 일원이었던 조선을 보호할 이유가 없었다.

          

미국은 조선을 배신하지 않았다. 자국의 국익에 충실했을 뿐이다.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것도,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 이후 열강 중에서 제일 먼저 이 조약을 파기한 것도 미국의 이익이었다. 미국이 조선을 지켜주고 조선의 이익을 실현시켜 줄 것이라는 고종의 믿음은 참으로 딱한 무지의 소산이었다.

           

구한말 이후 조선의 좌절·고통은 미국에 대한 잘못된 인식·기대에서 출발했다. 이후 일본의 식민지배와 남북 분단·전쟁은 한줄기로 묶이면서 미국이 ‘동아시아의 병부(東亞病夫)’가 된 중국의 역할을 대신한다. 미일영 해양세력의 합작에 의한 일제의 36년 식민지배가 없었다면 남북 분단·전쟁도, 통일의 과제도 없었을 것이다. 한민족의 100여 년 좌절·고통은 잘못 끼워진 첫 단추로부터 시작되었다.

          

--------- b ----------          

지금도 한반도는 첫 단추를 잘 못 끼운 옷을 그대로 입고 있는 형상이다. 주변 4강인 미·중·일·러가 그대로 자리하고 있다. 한반도는 남북으로 분열된 채 남북관계는 강대국 정치가 지배하고 있다. 한국은 다시 ‘원교근공’ 전략을 말하며 미국 편에 섰다. 미국과 중국의 처지가 달라졌을 뿐 제반 내외 상황은 구한말과 유사하다.  

         

19세기말의 격변기, 중국의 청은 개항 후 싹튼 한민족의 독립 의지를 억압하고, 조선의 개화를 저지해 조선을 중화질서에 묶어 두려고 했다. 청의 위안스카이는 식민지 총독처럼 행세하며 조중 조공관계를 실질적인 종주·속방의 관계로 재구성했다. 조선은 무지와 무력, 사대 모화와 굴종으로 부서진 배였다. 나라의 운명을 청·일·러·미 등 주변 4강에게 맡기고, 자신의 왕권을 유지하고자 칠관파천(七館播遷: 미관·영관·아관 외국공관으로 7회 도주 또는 도주를 시도)하다 사라졌다.  

     

미중 패권전쟁으로 지각변동 중인 21세기 초, 한반도 내외 정세는 19세기말처럼 위험한 상황으로 가고 있다. 남북방 3각관계가 확연해진 가운데, 한미동맹과 북한이 서로를 향해 전쟁을 연습하고 있다. 비핵화 전망은 갈수록 희미하고 북핵 위협은 커졌다. 심각한 것은 북한이 미국의 충직한 동맹인 남한을 제1의 적대국가(충견· 졸개·괴뢰)로 규정하고, 남북관계에서 ‘통일과 화해, 동족’ 개념 등을 모두 지워버린 것이다.  

         

과거 임진왜란과 청일전쟁, 한국전쟁은 모두 동아시아의 권력 변동기에 발발했다. 전쟁에서 취약한 한반도는 국가세력 혹은 진영 간의 전장이 되었다. 20세기와 달리 역사가 서에서 동으로 이동하고 있는 21세기에 서와 동의 거두들인 미국과 중국 간에는 어떤 식으로든 한바탕의 결판이 불가피하다. 그 전장은 다시 평화의 싹이 사라진 동아시아 한반도가  가능성이 크다.


 2024년 1월 4일, 전 주한 미국대사 해리스는 한 온라인 세미나에서 윤석열 정부 출범 후 “(미국은) 한국의 한미 연합훈련 재개와 연합군사대비 태세 강화, 대일본 접근에 고무됐다.” "(한국은) 북한위협 대응 능력을 희생시켜 가며 북한과의 대화해서는 안 된다.” “북핵협상 시도를 접고, 한미간 대응 역량을 강화한 뒤 북한이 움직이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남북관계에서 평화·통일의 싹을 자르고, '2민족 2국가론'으로 민족·통일의 개념을 지운 나라는 '조선'이다. 하지만 이는 주변국들이 오랫동안 추구해 온 동아시아 전략의 실질 목표였다. 이제 우리의 소원이었던 통일의 꿈은 사라졌다. ‘원교근공’ 전략으로 ‘탈아입미(脫亞入美)’하고, 통일부를 사실상 해체해 버린 한국은 해양세력의 방파제·북방초소 역할을 다할 태세다.


모두 100여 년 전에 첫단추를 잘못 끼운 옷을 그대로 입고 있는 탓이다. 끝 단추는 끼울 구멍이 없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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