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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울 Apr 26. 2024

관용이라는 것을 담는 것이 용기다.

치매 대상자의 일상생활을 돕기 위한 기본 원칙 중 한 가지가 대상자에게 맞는 일정을 만들어 규칙적인 생활을 하게 하는 것이다. 아주 쉽고 간단한 말 같지만 쉬운 말일수록 삶에서 지키기는 어렵다. 뻔 한말 같아서 깊이 생각하지 않고 흘려보내기 쉽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언제부터인가 쉽게 이해가 되는 내용을 만나면 붙잡아 둔다. 그리고 그 내용으로 많은 고민을 시작한다. 강사이자 선생의 자리는 학생들을 종착역에 다다르게 하고 싶은 마음을 불러내야 한다.     

 

무궁화호의 속도이든 KTX의 속도이든 그건 학생들이 결정해야 할 몫이겠지만 결국 가고자 하는 종착지는 같아야 한다. 그곳은 배운 것을 삶에 적용하는 “실행 역”이다.     


그러나 교재에 쓰여 있는 글자만으로는 이런 마음을 불러내기에 아주 많이 미흡하다. 인생은 고정이 아니라 역동적이다. 그런데 고정된 글자는 명사이기 때문에 누군가의 마음으로 들어가기도 어렵다. 생동감을 첨가하려면 나의 경험이나 다른 이의 경험을 덧붙여야 한다. 즉, 보고 들은 대로 삶이 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나를 가만두지 않고 움직이게  해야 행동으로 이어지는 삶이 되는 것이다.    


‘가르치려다 배웠다.’라는 말은 이렇게 내 삶에 먼저 적용할 기회를 얻는 것이다.     


 돌봄은 사람을 상대로 하는 일이고 나 역시 돌봄을 진행하고 있다. 대상이 노인이 아닌 아이들이라는 것 외에 다른 것은 없다. 노인과 아이, 특히 치매 노인과 아이는 닮은 점이 많다.     

 

치매 대상자는 기억력, 언어능력, 판단력, 인식력, 지남력 등 모든 인지능력이 저하된다. 치매 상태가 진행될수록 아이와 같은 수준의 인지능력이 된다. 아이와 치매 대상자는 수준에 맞는 돌봄을 해야 하고 그때 반드시 필요한 것이  융통성과 관용이다.     


내 삶에서 적용했던 부분을 예시로 들으려고 한다.   

  


아이들은 방학이 되면 “방학 일정표”를 가지고 온다. 방학 동안 계획했던 일을 어떻게 실행할지에 대한 시간을 관리하기 위함이다. 우리도 어릴 적 많이 시도했던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방학 내내 그 일정대로 실행하는 학생들은 극소수에 해당한다.   

   

나 역시도 그랬고, 방학마다 일정표를 그리고 있는 내 자녀들도 마찬가지다. 실패할 것을 알면서도 매번 방학만 시작하면 일정표를 그려본다. 난 아직까지 단 한 번도 일정표를 그리고 있는 자녀들에게 핀잔을 준 적은 없다.  

   

“어차피 실행도 못 할 거면서 왜 또 그리고 있어?”


이런 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이렇게 말했다.    

 

“잘하고 있어. 일정표를 그리는 오늘은 지킬 수 있을 테니 열심히 계획을 해봐.”

그리고 돌아서면서 이런 생각을 한다.      


일정표를 그리고 방학을 시작하라는 과제를 받았어도 한 번도 그리지 않는 아이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일정표를 그려보는 아이는 하루만큼은 실행까지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안 하는 것보다 한 번이라도 해보는 것이 나은 것이다.    

 

완벽하게 잘하는 사람과 비교하는 것도 때로는 필요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언제나 과거의 나와 비교하는 방법이다. 처음 만나는 방학이 아니라면 과거의 방학이 있었을 것이고, 지난번은 어떤 모습이었는지 회상을 통한 오늘의 진단, 그리고 내일을 향한 처방을 할 수 있다. 이렇게 처방된 약은 부작용이 없는 가장 좋은 성장 촉진제다.     


한 번도 그려보지 못한 아이는 이렇게 비교할 과거의 나도 없는 상태가 된다.     


그리고 모든 계획과 일정표에 반드시 담아야 할 것은 관용이다. 관용의 사전적 정의는 다음과 같다.    

 

“남의 잘못 따위를 너그럽게 받아들이거나 용서함.”      


난 여기서 주체를 바꾸어 본다. “나의 잘못 따위를 너그럽게 받아들이거나 용서함”  

   

남에게 베푸는 관용도 중요하지만 나에게 베푸는 관용은 더 중요하다.

관용이라는 것을 담는 것이 용기이기 때문이다. 씩씩하고 굳센 기운은 너그럽게  받아들이는 마음일 때 생겨난다.     


그러니 무언가를 계획하고 작심 3일로 끝난다면 관용을 한껏 꺼내어 내 온몸에 장착을 시켜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작심 3일을 대하는 태도도 점검해야 한다.     


작심 3일이 되어 버리는 가장 큰 원인은 의지가 약한 것이 아니라 지성이 약한 것이다.     

지성이란 지적능력, 사고하고 이해하고 판단하는 능력을 말한다. 유사한 단어로 지식, 지혜라고 하며 반대말은 감성이다. 의지는 감성의 영역이다. 감성은 연마하지 않아도 상황에 따라 빠르게 반응한다.     


그러나 지식과 지혜의 영역인 지성은 끊임없는 연마를 통해서만 체화가 가능하다. 작심 3일을 습관으로 만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매번 작심 3일을 반복하는 것뿐이다.     

 

이렇게 나 자신이 관용으로 이미 물들여 있어야 누군가의 일정표를 만들어 줄 자격이 되는 것이다. 그 일정표대로 실행이 되지 않더라도 핀잔 대신 용기를 지속적으로 담아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내 아이들에게 먼저 적용해 보았던 경험들은 이렇게 치매 돌봄을 하고자 하는 제자들에게 이어진다.


치매 어르신에게 맞는 일정을 만들어 규칙적으로 생활하게 하는 것도 좋지만 그 보다 먼저 선행되어야 할 것은 일정대로 지켜지지 않았어도 관용을 베풀 줄 아는 마음의 양식이고 그건 반드시 경험을 더하기 하고 있어야 한다. 


나 자신에게 베풀었던 관용이 있어야 타인에 대한 관용도 제대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도 내 큰 딸의 방에는 관용 담은 용기로 가득 채워져 있다.


 스스로  해야 할 과제의 일정표를 만들고 점검하는 하루를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매일 작성하는 내 딸의 To do l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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