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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울 Aug 02. 2024

노인 돌봄은  ‘증여’ 혹은 ‘선물’이 되어야 한다.

65세 이상 고령인구가 대한민국 전체 인구의 17% 정도인 약 900만 명이고, 2030년 쯤 이면 1200만 명, 전체인구의 25%를 차지하는 초 고령화 사회가 된다. 지표보다 더 겁이 나는 것은 텍스트에 쓰여진 글씨가 현실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지표를 만날 때마다 언급하는 문장이 있다.    

  

“내 노년은 내가 책임져야 합니다.”  

    

강의장에 검은 먹구름을 몰고 들어오는 순간이다.  멀지 않은 시간 안에 거대한 소나기가 내릴 것이기 때문이다.  걱정 소나기와 두려움 소나기가 강의장에 앉은 학생들을 흠뻑 적셔놓는다. 이 빗물을 부지런히 털어내며 공통적으로 생각하는 내용이 있다.    

 

“그래, 일을 해야 돼. 노년에는 반드시 돈이 필요하니 그 돈을 어떻게 벌어야 할지 고민하고 답을 찾아가야지.”    

 

내 강의를 들으러 오는 50대 후반 학생들이 가진 공통의 생각들이다.  나도 동의한다. 그러나 이 생각은 노년을 내가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의 전부가 아니고 일부다.     


내 노년은 내가 책임져야 한다는 말은 단순하게 돈을 많이 모아 놓으라는 것이 아니다. 더 나아가 심리적으로 무장해야 한다는 말도 아니고, 신체가 건강해야 한다는 것도 아니다.     

신체적, 심리적, 경제적으로 해결할 내용들은 이미 [노년을 상상하는 중입니다]라는 브런치 북에 연재를 했었다.      


하나만 가지고 해결되는 것은 없다. 그러니 그 하나를 위해 매진하며 돌진한들 결과가 만족스럽지 않았던 것이다. 완벽한 하나가 아닌 더불어 같이 가는 노년이 되어야 한다.


우치다 선생에 따르면 학술 행위는 일종의 ‘증여’혹은 ‘선물’같다. 내 생각에도 우리가 선철로부터 받은 ‘선물’을 다음 세대로 전달하는 것이 학술의 본질이다. 그것을 자신의 신체와 지성을 활용해 정성스럽게 다음 세대로 전달할 의무가 있다. <우치다 선생에게 배우는 법>박동섭 지음     


돌봄도 ‘증여’ 혹은 ‘선물’이 되어야 한다. 난 강의장에서 학생들에게 질문을 많이 하는 강사다. 그래서 종종 이런 질문을 던진다.  

   

 “여기에 왜 오셨습니까? 무엇을 위해서요? 취업을 하기 위함 입니까? 아니면 배움이 갈급해서 입니까? ”   

   

내 질문에 아무도 답을 시원하게 하지 않으니 내가 먼저  “맞다.” 라고 답을 해주어야 한다.     

 

그러나 그 답이 전부가 아니기에 다른 답도 제시를 해본다. 20~30년 후, 또는 10년 후 내가 노인이 되었을 때는 어떤 돌봄이 현재형이 되어 있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이다. 그 답을 만드는 것이 “내 노년은 내가 책임진다.” 라는 문장의 해답이 되어 줄 것이다.

     

연실 뉴스 기사에서는 노인 학대 사건이 조명되고 있고, 각종 병원에서는 감금과 약물남용으로 무자비하게 생명의 불씨가 꺼져간다. 살려달라고, 도와달라고 부르짖는 외침조차 외면당하고 있는 현실에 덜컥 겁이 난다.      

도대체 돌봄 이라는 행위 안에 “인간” 이라는 단어를 담기는 한 것일까? 난 이런 의문점을 찍으며 그 점의 색깔이 진해질 때마다 내 자리의 무게감에 가슴이 아려온다. 

  

나 역시도 돈을 벌기 위한 강의를 하고 있는지, 가르치는 일이 즐거워서 하고 있는지 무엇 때문에 여기 있는지 존재 의미를 찾아야 흔들리지 않고 방향을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삶의 범위가 넓어질수록 나를 흔들어 대는 것들도 더 많아진다. 방향키를 더 힘차게 부여잡기 위해서라도 난 돌봄의 의미를 매일 되새김질 한다.   

       

둘째 아이는  백일이 갓 지나자마자  어린이집에 갈 수 밖에 없었다. 육아휴직도 없는 직장을 다니고 있던 나는 다른 방법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소개 받은 어린이집을 찾아가 상담하며 원장님께 아주 무례한 질문을 하나 했었다.     


“돌봄 철학이 있으십니까?” 이 질문에 답을 들을 수 없다면 갓 백일된 내 아이를 맡길 수 없다고 판단했다.     

무례한 질문이었지만 정성을 다해 답을 해주신 원장님 덕분에 내 아이는 엄마 손에 자란 다른 형제자매 보다 남을 더 배려할 줄 알며, 다른 이의 마음을 공감할 줄 아는 따뜻한 아이가 되어주었다. 내가 늘 바라보던 원장님은 어린 내 아이를 포대기 천으로 돌돌 둘러 등을 내주는 그런 분이었다.   

  

철학은 화려한 수식어가 필요 없다. 얼굴을 기대어 온기를 느낄 수 있는 등 하나면 되고, 맞잡을 수 있는 손 하나면 된다. 말은 거짓말 할 수 있으나 손길은 거짓말이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화려하게 포장된 포장지를 뜯어내고 속을 훤히 보여줄 수 있는 철학이면 그것이 투박하고 날 것이도 충분하다.  돌봄의 자리에 있거나 돌봄을 받을 자리를 향해 걸어가는 모든 사람들도 “돌봄 철학”은 명확히 세워두길 바란다.

  

그 돌봄 철학이 실천될 때 비로서 아름다운 증여도 일어나게 된다. 그리고 그 증여의 기쁨도 가득 느끼게 될 것이다.     


내 희생을 억울해 하지 말자. 알아주지 않는다고 불평부터 앞세우거나 적은 보수를 받는다고 투덜대기 전에 내 미래에 받게 될 그날의 돌봄을 한번쯤 그려볼 수 있는 지혜가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지금 제대로 된 돌봄을 정립하지 않으면 내 미래의 돌봄 역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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