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보니 시댁일기
육지에서 몇 년 동안 우울증 치료를 받았다. 아이가 세 살 즈음, 시댁문제로 남편과 나는 몸싸움까지 벌였다. 우리는 그때 서로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고받았고 결혼생활에 있어서 가장 큰 위기를 맞았다. 그날 이후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상담센터에 갔다. 2년 동안 꾸준히 상담치료를 하다가 상담 종결을 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일자리까지 구하게 되었다. 그 이후, 필요할 때는 언제든 찾아와도 된다고 하셨지만 아이가 기관에 간 시간을 제외하고는 일을 했기에 시간적 여유가 없었고 스트레스는 더해져 감정기복이 심해졌다. 결국 상담센터를 다닐 시간이 없었고 정신과를 추천받았다. 정신과 진료는 생각보다 간단했다. 첫날에는 기본적인 검사들이 있었지만 다음 진료부터는 5분도 안 되는 진료시간과 약처방이 끝이었다.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드는 상담치료보다는 비교적 효율적이라는 생각에 꾸준히 다녔다. 그렇게 점점 나아지는 줄 알았다. 이사를 준비하면서 바쁜 일상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다녔고 의사 선생님은 제주에 가서도 치료를 받아야 한다며 소견서까지 써주셨다.
제주로 입도하고 나서는 겨우내 아이와 24시간을 붙어있다 보니 병원에 갈 시간이 나지 않았고 일을 하지 않으니 그나마 신체적 힘듦이 덜해 그럭저럭 참으며 지낼만했다. 아이가 새 학기를 시작하고 나를 돌볼 시간이 찾아왔다. 평온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작스러운 시아버지의 방문소식과 노쇼로 인해 눌러왔던 감정이 폭발하듯 남편에게 쏟아내기 시작했고 남편은 그런 나에게 말했다.
"언제까지 그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 거야? 아직도 그때 이야기(나의 우울일기 1편 2화 <예단, 하자 있는 애들이 하는 것>)가 해결이 안 된 거야?"
그 순간 나는 9년째 해결될 수도 없고, 되지도 않은 과거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남편이 저런 말을 하는 것이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면서 절망스러웠다. 그리고 그 순간의 내 모습이 보였다. 한 참이나 지났고 그들에게는 지나온 이야기(나에게는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를 꺼내면서 분노와 울분을 토해내는 내 모습을 보며 '지금 내 상태가 정상은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후 마음을 가다듬으려고 하면 할수록 분노와 울분이 계속 올라왔다. 나는 독서와 산책으로 마음을 달래곤 하는데 독서도 감정의 파고가 정도껏이어야지 감당하기 힘든 마음에 글이 눈에 들어오지 않아 책을 덮어버렸다. 동네를 크게 한 바퀴 도는 한 시간 넘는 산책을 해도 쌓여만 가는 분노와 울분에 마음이 짓눌리는 지경에 이르렀고 가슴이 답답해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결국 나는 미루고 미루던 정신과에 갔다. 육지에서 받아온 소견서를 내밀고 약처방을 바랐다. 아무래도 소견서로는 부족했는지 정신과에 가면 통과의례처럼 하는 여러 검사들을 하기 시작했다. 제일 지겹고 힘든 나의 지난날 상처를 또다시 반복해서 말로 꺼내야 한다는 사실이 나를 더 화나게 했다. 그래도 치료를 받아야 했기에 상처와 마주하는 선택을 했다. 죽도록 싫었지만 해야 했다. 한편으로는 그렇게 싫은 과거와 상처와 마주하면서까지 이 지옥 같은 쳇바퀴에서 벗어나고 싶은 나의 생의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결과는 심한 우울증. 내 그럴 줄 알았다. 새로운 사실이 아니었기에 놀라지도 않았다. 어쩌면 좀 허무했다는 표현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새로운 진단이라도 나왔더라면 흥미롭기라도 했을 텐데 말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에서 유난히도 파란 하늘을 보며 결심했다. 운동과 글쓰기. 이 두 가지를 백일 동안 해보자고. 글쓰기의 주제는 그저 그런 일상의 일기가 아닌, 나의 우울에 대한 이야기를 써보기로 했고 나도 모르는 내 우울의 뿌리를 찾아갈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실낱같은 희망을 품어 보기도 했다. 또 내가 느끼는 감정의 무게가 가볍든 무겁든 모든 날들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다. 그렇게 우울에 무뎌지고 싶었다. 우울을 내 삶의 하나로 받아들이고 싶었다. 그리고 나의 우울 이야기를 통해 단 한 사람이라도 위로받기를 바라는 마음 또한 조심스레 생겨났다.
그렇게 한 자 한 자 적다 보니 역시 분노와 울분, 억울함이 대부분이었다. 소재 또한 시댁과 친정, 가족이야기가 9할을 차지했고 나의 상처에 대한 이야기는 시댁이 8할이었다. 내 우울의 대부분이 시댁 때문이었을까. 어쩌다 보니 시댁일기가 되어버린 나의 우울일기. 지난달 다녀가신 시어머니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
"지금까지 가족을 위해 애썼으니 이제부터는 너의 성장에 더 많은 시간을 보내렴. 늘 행복해라."
이 한 마디에 모든 울분과 분노가 다 사그라드는 듯했다. 신기하리만치 시댁에 대한 모든 감정으로부터 해방감을 느꼈다. 자유로워졌다. 그렇게 느끼는 데에는 단톡방을 나왔던 것이 큰 몫을 했겠지만 말이다. 결국 내가 시어머니에게 듣고 싶었던 말은 지난날 나의 내조와 육아에 대한 인정과 앞으로 내 인생에 대한 응원의 말이었을까. 한참을 생각하고 곱씹었다. 그랬다. 시어머니에게 사랑받고 싶었던 나였음을 인정한다. 그리고 늘 행복하라는 말씀에서 거리감이 느껴져 마음이 편해진 것도 있다. 관계에서 안정감을 느끼는 거리말이다.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딱 좋은 거리.
시어머니의 메시지를 받은 이후 내 머릿속은 깔끔하게 정돈 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 나는 즐겁고 신나는 날이 더 많아졌다. 그렇다고 우울하지 않은 건 아니다. 내 마음의 근력이 조금 강해졌다고 해야 하나. 이제 나는 내 문제보다 타인의 이야기를 듣고 눈물을 흘리는 일이 많아졌다. <타인의 슬픔을 마주할 때 내 슬픔도 끝난다.(이미령 저, 샘터)> 라는 책이 떠오른다. 그렇게 나의 슬픔과 우울의 1막은 끝이 났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의 그릇이, 나의 세상이 넓어졌다.
그러나 나는 방심하지 않을 거다. 시댁이란 아이스링크와 같으니 방심하면 언제든 넘어질 수 있음을 기억해야지. 이제는 즐기자. 이 아슬아슬함을. 이 위태로움을. 빙판에서 춤추는 피겨 여왕까지는 못되더라도 즐기자. 그리고 팔을 허우적거리더라도 넘어지지는 말자. 아플 테니까. 링크장 밖에서 관전하는 재미도 느껴보자. 당분간은 시댁에 더 이상 매몰되지 않을 것 같지만 한 치 앞을 모르는 것이 인생. 또 오너라 시댁의 파도여. 절대 매몰되지 않으리.
이미지 출처: 장영 작가님(@reinatattoo) 작품 전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