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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펜사콜라 Oct 07. 2022

내가 걷고 있는 길,

더 이상 이정표에 집착하지 않기를 바라며,

9월의 어느 뜨거운 가을날 아침, 난생처음으로 둘레길이란 곳을 걷기 시작했다.


서울엔 8개의 코스로 나누어 이어진 둘레길이 만들어져 있고, 난 간단한 간식과 물 병 하나를 가지고 1 코스의 출발지점까지 지하철을 타고 도착해서 기대 반 설렘 반으로 걷기 시작했다.


서울의 북동쪽 도봉역에서 시작해서 화랑대 역까지, 수락산과 불암산을 거쳐 20Km에 달하는 끝없는 산기슭 길로 이어지는 서울 둘레길 1코스는 난이도가 8개 코스 중 유일하게 "상급"이었고 그 이유는 걷기 시작한 지 얼마지 지나지 않아 알게 되었다.

둘레길을 안내하는 표지와 나무에 걸려있는 주황색 리본이 코스 내내 친절히 안내하고 있음에도 두 번이나 길을 잘못 들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곤 했다.

산길로 연결된 길은 오르막과 내리막을 끝없이 반복하고 나무들 사이로 내리쬐는 따가운 햇빛에 얼굴이 그을리고 온 몸이 땀에 젖어 가는 고난의(?) 행군이었다.

다리는 점차 나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기계적으로 걷고 있는 듯 느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걷는 동안 몸은 지쳐가고 심장 박동은 끝없이 뛰어올랐지만 머릿속은 점차 맑아지고 비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아무 생각을 하지 않기를 노력해서 아무 생각을 하지 않기는 쉽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걸을 땐 눈에 들어오는 산속 풍경 하나하나와 내딛는 발 자국 앞에 시선을 모으고 집중하는 일 이외에 다른 생각을 하기는 쉽지 않다.

비우려 노력하지 않았지만 비워지는 조금은 신선한 경험이다. 



"내가 지금 가고 있는 길이 힘들고 지치는 길이 아니라면 나는 내 인생의 내리막을 가고 있는 것이다"라고 누군가 이야기했던 것 같다.

내가 가는 길이 힘든 건 내가 더 높은 곳을 해야 간다는 것이고 쉽지 않은 길인 만큼 그 보상도 따를 거라고,

맞다, 삶이 늘 평탄한 길만을 걸을 수 없으니 때로는 도전이 필요하고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야 하는 것이 정답일 것이다.


하지만, 길은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고 바른 길이 있으면 구불구불 한 길도 있으며 마른 모래 바닥길이 있으면 축축하고 젖은 진흙 길도 있다.

길은 그 자체로 내 앞에 놓여 있고 나는 뚜벅뚜벅 그 길은 걸어가면 그만이다.

목표로 한 도착 지점 또한 또 다른 길로 이어지는 새로운 길의 시작 점 일뿐이다. 

서울의 둘레 길이 그렇듯 모든 길은 출발한 곳으로 돌아오고서야 마무리된다.  


지금의 내가 걷고 있는 또 다른 길은 어디로 이어질지 어느 곳에서 마무리될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정표를 찾아 헤매이기 보다는 순간순간 나뭇잎 사이로 쏟아지는 투명한 햇빛과 가끔씩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보고 듣고 느끼는 그런 길이었으면 좋겠다. 

그저 가다가 우연히 발견한 편의 점에서 시원한 이온음료 한 캔 들이켜면 그만이다.



발 앞으로 툭 하고 도토리 하나가 떨어져서 굴러왔다. 

우연처럼 내 길 앞에 나타나 난 가는 길을 멈추었다. 

도토리를 주워서 먼지를 털고 양지바른 숲 속으로 다시 던져 주었다. 

커다란 나무가 되어 나중에 이 숲에서 다시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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