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더링, 추락하기_ 매트 위로 낙하

벽, 돌, 길 3

by 혜투

꿈속에서 나는 추락하고 있었다. 어디에도 부딪히지 않고 끝없이 떨어질 뿐이었다. 얼마나 더 깊이 내려가야 바닥에 닿을까. 불안 속에 허우적거리다 가야 할 곳과 가누어야 할 몸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렸다. 허공에 부유하는 채로 나를 내버려 두었다. 힘은 빠지고 눈이 감기자, 오히려 편안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자는 것도 지겨워 슬며시 일어나 보니 땅도 벽도 없는 어둠 한가운데서 작은 돌이 보였다. 그건 홀로 우주를 떠돌던 이가 발견한 별처럼 푸르게 빛났다. ‘만져보고 싶다.’ 아주 오랜만에 생긴 소망이었다. 손을 뻗자 거칠고 단단한 감촉이 느껴졌다. 힘껏 당겨도 꿈쩍 않고 한 자리에 고정되어 있었다. 양손으로 잡고 매달리자, 대롱거리던 발 밑에도 디딜 돌이 생겼다. 이어서 다음, 그다음 돌이 나타났고 사방에 길이 보였다.

어느새 추락은 멈췄다. 나는 온몸으로 중력을 느끼며 올라갔다. 팔과 다리가 더 이상 버티지 못할 때까지 쉬지 않고 움직였다. 아득한 저 밑에 무엇이 있을지 몰라 두려웠다. 그러나 금방 한계에 이른 몸은 휘청거렸다. 발이 미끄러지고 손아귀가 풀리는 순간 돌을 놓치고 말았다. 아, 다시 추락하는 건가. 습관처럼 축 늘어져 눈을 감았다.

곧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 눈을 떴을 때, 등에 닿은 바닥이 푹신했다. 걱정만큼 아프거나 무섭지 않은 찰나였다. 누군가 손을 잡아 일으켜주었고 나는 온갖 빛깔의 돌들이 박힌 벽 앞에 섰다. 또 해볼 수 있겠다고, 이제는 안전한 매트 위로 착지해 다시 일어나면 된다고 생각하면서.


실내 볼더링장 벽의 높이는 4m 정도다. 오르는 도중에는 잘 모른다. 옆으로 이동하거나 내려올 때 문득 시선이 아래로 향하는 순간은 아찔하다. 발은 눈보다 지면과 가깝기 때문에 몸은 생각보다 훨씬 낮게 있다. 멀리서 지켜볼 땐 그다지 높지 않은데 괜히 겁먹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지점에 올라가면 무서울 수밖에 없다. 이 발을 떼면 당장 떨어질 것 같고, 커다란 볼륨과 튀어나온 홀드에 얼굴이 부딪힐 것 같다. 초반에 나는 다른 사람이 아찔한 높이에서 걷고 뛰는 장면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볼더링은 안전장치가 따로 없기에, 일일강습에서는 낙법을 중요하게 가르친다. 스파이더맨처럼 아스팔트 위로도 날렵하게 착지한다면 멋지겠지만 떨어질 때는 절대 손을 짚지 않아야 한다. 또한 두 발로 서지 말고, 뒤로 구르며 엉덩이와 등으로 충격을 분산시키는 게 좋다. 가장 바람직한 건 홀드 하나하나를 잡고 내려오는 ‘다운 클라이밍’ 방식이다.

늘 조심스럽게 다운 클라이밍만 하던 난 미끄러지는 발을 확인할 새도 없이 떨어져 발목 인대를 다쳤다. 그러나 부상을 당한 이후 이상하게도 추락이 덜 무서워졌다. 또 몇 번은 팔 힘이 빠져 어쩔 수 없이 뛰어내렸는데 너무 아무렇지 않아 매트의 안전함과 육체의 탄력성에 감탄했다. 사람은 생각보다 쉽게 다치고 또 쉽게 안 다친다. 지금은 부딪히고 떨어져도 죽진 않는다는 생각만 하기로 했다. 이미 겁이 너무 많기 때문에 조금 방심할 필요가 있다.

물론 높은 곳에서 갑자기, 위험하게 떨어지면 모두가 걱정한다. 그러나 약간은 허무하고 우스꽝스러운 모양새로 떨어진다면 큰 웃음을 줄 수 있다. 벽에 대고 90도 인사를 하거나, 머리를 쿵 찧거나, 몸이 빙그르르 180도 돌아 사람들과 마주 보게 될 때, 아니면 시작도 못해보고 미끄러져 민망할 때에는 뻔뻔하게 “네? 저 불렀어요?” 하고 매트 아래로 돌아오면 된다. 그럼 다들 모른 척 말을 걸어줄 것이다.

수, 토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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