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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The Bankers 1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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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별 Mar 15. 2022

한 발짝 앞으로

소설 The Bankers_어느덧 매너리즘에 젖은 꼰대


“어머님께서? 정말 멋지다.”     



엄마의 그림을 받아 든 김 전무의 눈과 입이 웃었다. 옆에서 보고 있던 박 이사도 감탄사를 내뱉었다. 몇 년 만에 붓을 든 엄마. 엄마는 오랜만에 묵향을 맡으며 먹을 갈고 빈 화선지를 바라보니 좋았다고 했다. 마음이 벅차오르기도 하고 차분해지기도 했다고. 그러면서도 연신 부족하다며 아쉬워했지만 어쨌든 그림을 내어주었다. 먹과 연한 물감, 그리고 여백을 담은 엄마의 그림은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내가 원하던 ‘따뜻함’이 있었다. 엄마의 삶과 나의 삶이 이제야 한 발짝 앞으로 나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전무는 회사의 외국인 대표가 봐도 좋아하겠다고 말하며 그림을 벽에 걸었다.





    

“저…. 전무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다들 자리 돌아가려는데 최 대리가 머뭇거리며 김 전무를 불렀다. 박 이사와 나는 눈치껏 빠졌다. 김 전무는 최 대리를 데리고 나갔다. 최 대리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것인지 신경이 쓰였다. 그러고 보니 최근에 최 대리와 따로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없었다. 최 대리가 이사 간 후로는 집이 멀어져 퇴근길을 함께하지 못했고, 최 대리 어머니의 항암치료를 챙기느라 바빴다.


    

한참 후 최 대리 돌아왔다. 박 이사가 물었다.     

“무슨 일 있어?

아무래도 퇴사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요.”

최 대리가 담담하게 말했다.     



최 대리는 어머니의 항암치료 길어지고 있고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환자가 힘들어해서 보호자의 적극적인 역할이 필요한 것 같다고 했다. 일도 집중하지 못하고 어머니의 투병 생활도 제대로 도와주지 못해서 속상하다고 했다. 병간호를 하며 앞으로 무엇을 해볼지 고민하려 한다며 덧붙였다.



 가족이라고는 저 하나밖에 없어서요.

 대리가 바닥을 쳐다보며 말했다. 박 이사 나 그저 ‘고생이 많다.’라고 말해줄 수밖에 없었다. 박 이사가 저녁에 최 대리 소고기나 먹이러 가자고 했다. 그제야 최 대리 웃었다.


     

한우 중에서도 플러스를 두 개나 받은 고기만 취급한다는 식당으로 향했다. 박 이사가 오늘은 본인이 쏠 테니 양껏 먹으라고 했다. 불판 위에서 지글지글 익어가는 고기를 기다리며 반찬부터 먹었다. 고로 한우는 와인과 함께 먹어야 한다며, 박 이사가 와인도 한 병 시켜주었다. 우리는 말없이 잔을 부딪치고 목을 축였다. 불판 위의 고기를 바라보던 최 대리가 입을 열었다.     



“항암치료가 엄청 힘든 과정이더라구요. 옆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힘들어요.”

“그러니까 네가 잘 먹어야 해.”

박 이사가 다 익은 고기를 최 대리 접시에 올려주었다.

“윤 전무님은 워낙 강하신 분이니까 잘 이겨내실 거야.”

나도 한마디 거들었다.     



“엄마와 같이 살아보니…. 전 엄마에 대해 아는 것이 없더라구요. 엄마가 좋아하는 음식, 엄마를 기분 좋게 하는 음악, 슬픈 엄마를 위로해 줄 수 있는 엄마 친구의 연락처…. 환자에게 필요한 것을 해 줄 수가 없어요. 어떻게 보면 모르는 사람이었어요. 참 이상한 것 같아요. 가족인데 남보다도 더 모르는 거죠. 부모는 자식이 밖에서 어떤 사람인지 모르고, 자식은 부모가 어떤 삶을 살아온 사람인지 모르고….”     



최 대리의 말을 들으며 지난 일이 생각났다. 아버지가 병원에 계실 때, 아내가 아버님은 무슨 음식을 좋아하시냐고 물었다. 통 입맛이 없으신데 뭐라도 사드리면 좋겠다고 했다. 나는 겨우겨우 회를 생각해냈었다. 아내는 회는 익히지 않은 음식이니 다른 것이 좋겠다고 했는데, 그러자 나는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하루는 아내가 아버지가 트로트를 좋아하셨는지 발라드를 좋아하셨는지 물었다. 평소 즐겨 들으시던 노래를 틀어드리면 뇌를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겠냐고 했다. 나는 역시나 몰랐다. 병실로 아버지의 친구들이 찾아온 날이 있었다. 그분들은 나를 매우 잘 아는 사람처럼 대했었지만 나는 아버지의 친구들도 몰랐다. 나의 무관심과 무지 부끄러웠다.      



“지금부터 알아가면 되지. 이야기 잘 들어드리고, 최 대리가 그동안 하고 싶었던 말도 해봐.”

나는 이제 아버지와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누기가 어렵지만 최 대리는 시작할 수 있으니 부럽다는 말은 속으로 삼켰다.     



회사 그만두고 해 보고 싶은 일이 있었어?”

최 대리의 진로 고민을 처음 들은 박 이사가 물었다.     

“그냥요…. 이 길이 맞나 싶은 거죠.”

최 대리가 와인잔을 비우며 말했다. 그 잔은 내가 다시 채워주었다. 짙은 보랏빛이 빙그르르 돌았다.     



“야. 적성에 맞는 일 하며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냐. 일에서 자아실현을 찾지 말고 취미를 개발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박 이사는 나와 같은 말을 했다. 박 이사와 나는 현명한 것일까 아니면 어느덧 매너리즘에 젖은 꼰대가 된 것일까.     



“지난번에 부장님이 앱이나 게임 만들어보라고 말씀해 주신 적이 있었는데요, 만들어보고 싶은 앱이 생겼어요.”

“아 그래? 궁금하네.”

박 이사도 나도 바쁘게 고기를 씹으며 최 대리를 보았다.     



“mhealth라는 분야가 있더라구요. 스마트폰을 이용한 원격의료 같은 거예요. 앱이나 워치와 연동해서 건강 상태를 모니터링하고 관리하는 개념이래요. 이번에 엄마 일을 겪으면서…. 우울증 예방 앱 같은 걸 개발해볼까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요즘은 어린 학생들부터 직장인, 주부, 어르신들까지 우울증을 앓는 사람이 많대요. 잘 되면 그다음엔 치매 어르신들을 도울 수 있는 앱도 만들어 보고 싶어요. 그런데 우리나라는 관련 규제가 심하대요. 코로나 때문에 원격의료 분야도 변화 중이긴 하다고 해서 한번 알아보려요.”     



“우와, 멋진 생각이야. 여기요! 4인분 더 주문할게요!

박 이사가 외쳤다.

“의미 있는 일이네. 응원한다. 최 사장.”

나는 와인잔을 들었다. 박 이사와 최 대리도 함께 와인잔을 들고 건배를 했다.     



“아직 제 머릿속에 뒤죽박죽이에요.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공부해야 할 것도 많더라구요. 그래도 응원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최 대리가 머리를 긁적였다. 그 모습이 참 기특하고 대견했다. 우리는 최 대리의 사업 구상을 조금 더 들 후 헤어졌다. 다음날 최 대리 어머니의 치료 일정이 있기도 했고, 아내에게 붙잡혀 사는 새신랑 박 이사가 서둘러 귀가해야 한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몇 주 후, 내 옆자리는 비워졌다. 든 사람은 몰라도 난 사람은 안다고 최 대리의 빈자리가 서운했다. 일이야 내가 더 하면 되었다. 사람이 그리웠다. 최 대리는 꽤 괜찮은 막내이자 친구였기 때문이었다. 최 대리는 자리를 정리하면서 내게 삼선 슬리퍼를 주고 떠났다. 발이 큰 편이라 최 대리의 슬리퍼를 신을 수는 없었으나 그냥 두고 가라고 했다. 밥 먹을 시간이 다가올 때마다 메뉴를 정하던 최 대리의 삼선 슬리퍼를 물끄러미 보았다. 최 대리가 성실히 보호자의 임무를 다하고 있기를, 그 기특한 사업 구상을 부디 실전에 잘 적용해서 번듯한 사장이 되어 나타나기를 바라는 것이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이었다.     



김 전무는 딸의 결혼 날짜를 잡았지만 나와 박 이사는 안 와도 된다고 했다. 가족끼리 조촐하게 하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김 전무네 이야기를 처음 들은 박 이사는 당황하는 듯했지만 프로답게 표정 관리를 잘했다. 김 전무는 딸과 사위를 한집에 데리고 살게 되었다고 했다. 김 전무의 사윗감은 사진을 전공하는 학생이라고 했다. 요즘 같은 세상에 사진으로 먹고살 수 있겠냐며 답답하다고 말하는 김 전무는 사윗감이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그래도 군대는 다녀와서 다행이라는 김 전무에게, 박 이사는 작년에 가보았다는 라이프 사진전을 이야기해주며 오히려 요즘 같은 세상에 사진으로 더 성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 말을 듣는 김 전무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김 전무는 딸과 사위 얼굴을 보면 아직도 화가 치밀어 오른다고 했다. 그런데도 백화점의 아기용품 코너는 자꾸만 가보게 된다고 했다. 이 복잡한 마음은 아무도 모를 것이라고도 했다. 딸이 꼭 본인과 똑 닮은 딸을 낳아서 한번 키워 봐야 한다, 덕담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말을 종종 했다.


     

그즈음 박 이사네도 임신이 화두인 것 같았다. 어느 날 박 이사가 물었다.

“강 부장, 난임 병원이라는 곳 알아?”

“들어봤어요.”

“부모님이 자꾸 나보고 황 대리와 가보라고 해. 내 나이가 많아서 신경 쓰인대. 요즘엔 가는 사람 많다고 어디서 듣고 와서 자꾸 말하네. 가면 도움이 되려나?”

“글쎄요…. 아직 얼마 안 되셨잖아요.

“강 부장네 첫째는 얼마 만에 생겼어?”

“흠…. 두 번째 결혼기념일쯤 임신이라고 했어요.”

“그렇구나…. 그런데 나솔직히 이가 신경 쓰이긴 해서…. 가 봐야 할 것 같기도 한데 또 가기 싫은 마음 알아? 왠지 무서워.”

“괜찮으실 거예요. 형수님과 잘 상의해보세요.”     



김 전무네 이야기를 알게 된 박 이사는 역시 젊어야 임신이 잘 되나 보다고 중얼거리다가 김 전무에게는 비밀이라고 했다. 나는 틈날 때마다 운동을 하면 도움이 될 것이라고 슬쩍 말했다. 박 이사는 그다음 날 바로 회사 근처의 헬스장에 PT를 끊었다. 앞으로 점심시간마다 다녀올 것이라고 하면서. 역시 박 이사는 추진력과 성실의 아이콘이었다. 박 이사를 헬스장에 보내고 나는 근처 식당에서 혼자 점심을 먹거나 포장해서 가져오곤 했다. 혼자서 밥을 먹고 돌아오던 어느 날, 모르는 번호에서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강 부장님이시죠?”

“네, 맞습니다.”

“골드만삭스의 박 전무입니다. 지난번에 회의에서 만난 적은 있는데 통화는 처음이네요.”

“아, 안녕하세요.”

업무능력은 익히 들었습니다. 이사로 스카웃 하고 싶습니다. 연봉 및 기타 조건은 메일로 보내겠습니다. 답변 기다리겠습니다. 잘 생각해보세요.”     



전화를 끊고 차분히 숨을 내쉬었다. 일단 기분은 좋았다. 예전에 내가 최 대리에게 했던 말이 생각났다. ‘이 세계에 영혼의 단짝이 어딨냐. 다 돈 보고 움직이는 거지. 너도 돈 때문에 여기서 개고생 하는 거 아니야?’ 연봉 올라가는 소리가 들렸다. 영혼이고 나발이고. 내 몸값을 높일 기회가 왔다. 잡아야 한다. 돈을 모아 도도 하고 수도 넓히고 싶다.     



그런데 김 전무의 얼굴이 떠올랐다. 평범한 듯 보이지만 만나기 어려운 훌륭한 리더. 그가 사 준 콩나물국밥의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러닝머신 위에서 뛰고 있는 워킹머신 박 이사의 뒤통수가 보였다. 최 대리 빈자리를 채우느라 고생한다며 같이 고통을 분담해주고 있는 의리의 새신랑. 젠장. 승진과 연봉이 저 멀리 날아간다.     



어쨌든 내일까지는 고민해보기로 했다.          




본 소설은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 연재 예정입니다.

사진은 Pexels에서 검색하여 사용하였습니다.

소중한 시간을 내어 읽어주시는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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