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에 보름달이 보였다. 크고 밝았다. 그래서 옛날 사람들은 보름달을 향해 소원을 빌었을까.
밤하늘의 저 달이 소원을 들어준 것일까 아니면 아이 말대로 달에 살고 있다는 옥토끼 두 마리가 귀를 쫑긋거리며 들어준 것일까. 아이고. 일이 하기 싫으니 머릿속에 쓸데없는 잡생각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밤이 깊어가도록 반성문을 쓰던 중이었다. 두 줄을 겨우 채운 나는 더 쓸 말이 없었다. 이럴 때는 선배들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노트를 얻어내야 한다. 등을 돌리고 박 이사를 나직이 불렀다.
“이사님….”
“무슨 일이야?”
“도대체 반성문에는 무슨 말이 들어가야 하는 걸까요?”
“아, 그것 때문에 아직도 앉아 있는 거야? 내가 지난번에 작성한 파일 메일로 보내줄게.”
“감사합니다.”
마우스를 쥔 오른손 검지가 다시 활력을 찾았다. 바로 이것이었다. 나는 날짜와 기업명을 바꾸고 내용을 살짝 손을 본 후에 완성했다.
“이사님 덕분에 끝냈습니다. 지금 보내드릴 테니 검토 부탁드립니다.”
나의 반성문을 읽은 박 이사는 웃으며 발행사로 보내라고 했다. 오른손 검지가 몇 번 더 신나게 일했다.
“근데 반성문이라니. 표현이 정말 적절하다.”
“딱 반성문인 것 같아요. 목표한 만큼 발행을 채우지 못했으니 말이에요. 우리 잘못이든 아니든 고객 만족에 실패했고…. 경위를 상세히 밝히면서 앞으로 잘하겠다는 다짐도 넣어야 하는데 정말 쓸 말이 없었어요.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하하하. 맞네! 반성문. 그럼 오늘 일은 다 끝났어?”
“이제 출장 준비 시작하려구요. 이번 건은 절대 반성문을 쓰지 않도록 잘해보려고 합니다.”
“그래. 좋은 자세야. 내일 보자.”
박 이사를 보내고 나는 미국에서 진행될 투자자 미팅 준비를 시작했다. 지난 두 해 동안 업계는 출장 없이 컨퍼런스콜만으로도 상당히 많은 부분이 해결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데도 ‘만나야지’라는 주장이 점점 더 많아지는 것은 왜일까. 역시 얼굴 보고 마주 앉아서 이야기해야 더 잘 풀리는 것일까.출장이 주는 즐거움이 있는 것일까. 어쨌든 나는 컨퍼런스콜로 진행되는 투자자 회의보다는 훨씬 나은 결과를 가지고 돌아오겠다고 나름의 목표를 세웠다. 김 전무와 함께 출국할 예정이기에 사소한 부분까지도 더 세세하게 챙겼다. 문제의 전염병이 여전히 창궐하고 있지만, 공항은 점차 분주해지고 있었다. 2년 만의 비행. 걱정 반, 설렘 반의 출장이 될 것이었다.
오랜만에 비행기를 탄다고 하니 가족들이 더 즐거워했다. 딸아이는 구름을 담아오라고 했다. 비행기 창문을 살짝 내리고 구름을 담아오면 될 일이라고 했다. 아내에게 SOS의 눈빛을 보냈더니 아내는 기내에서 아이스와인이나 한 병 사 오라며 못 들은 체하다가, 구름은 솜사탕 과자로 대체하면 된다고 조언해 주었다. 아직 말을 못 하는 막내는 다행히 요구사항이 없었다. 이럴 땐 효자다.
월요일 오전에 떠나 정신없이 일만 하다가 토요일 오후에 다시 도착하는 일정이었다. 투덜거리는 내게 아내는 주말을 지켜내는 것이 어디냐고 했다. 여행용 가방을 꺼내 주던 아내는 양복과 속옷, 양말을 개수대로 챙기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나를 바라보는 아내의 시선을 모른 척하며 아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헤아려보려 했다.
아내는 해외 출장을 자주 갔었다. 아내가 치안이 좋지 않은 중남미의 국가로 열흘씩 나갈 때면 내 마음이 다 조마조마했었다. 총을 든 가드가 숙소 앞에 서 있다는 곳으로 다니던 아내에게 그만두라는 말도 여러 번 했었다. 그래도 아내는 자신만의 사명감을 가지고 재미를 찾으며 일했던 것 같았다. 아내의 단절된 경력. 아내는 모르겠지만 내게도 늘 신경 쓰이는 부분이었다. 과연 나는 가족들의 ‘고객 만족’에도 힘쓰고 있는 것일까. 내가 부디 괜찮은 가장이기를 바라며 아내가 말하는 와인과 아이가 원하는 구름을 출장 준비물 목록에 함께 써넣었다.
‘이 비행기는 뉴욕까지 가는 대한항공 KE081편입니다. 목적지인 JFK 공항까지의 비행시간은 이륙 후….’
기장의 방송을 들으며 기내 면세지를 들고 있으니 비행기에 탔다는 사실이 그제야 실감 났다. 열네 시간 동안 긴 다리를 구겨 넣을 생각에 새삼 심란하기도 했다. 그래도 덕분에 혼자만의 고요한 시간이 생겼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출장 자료를 확인하다가 기내식을 먹고, 영화를 보고, 한숨 자고 일어나도 아직이었다. 구름을 찾으며 창밖을 보았다.
내 몸값을 높일 기회. 눈이 휘둥그레졌던 그때의 그 제안. 나는 꼬박 하루 동안 수백 번 마음을 바꾸었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이 자리를 지켰다. 홍콩에서 서울로 돌아오고 싶어 발버둥 치던 내게 기회를 준 이 팀을 이렇게 떠날 수는 없었다. 영혼의 단짝도 없고 의리 따위도 없다는 나였지만 김 전무와 박 이사의 얼굴이 아른거려서 별수 없었다. 게다가 아내는 내가 이 팀으로 온 지 아직 한해도 채 되지 않았다는 점을 상기시켜 주었다.
나는 언제나 열심히 달렸다. 학교 다닐 때는 열심히 공부했고, 군대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도 열심히 했다. 사회에 나와서는 다시 부지런히 배우고 일했다. 그 과정에서 때로는 수석 졸업이라는 명예로, 때로는 포상휴가라는 달콤함으로, 때로는 최연소라는 타이틀로 부모님을 흡족하게 해 드렸다. 비교적 일찍 결혼했고 아이도 낳았다. 그렇게 살면 되는 줄 알았다. 그러면 지금쯤에는 넓은 집에서 양주를 마시며 좋은 자동차를 몰고 살 수 있을 줄 알았다. 성공한 자의 삶으로 가고 있는 줄 알았다.
‘과도한 경쟁’이라는 꼬리표가 붙는 사회 속에서 그것이 ‘경쟁’ 인지도 모르고 그렇게 살았다. 경쟁이 나쁜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어쩌면 여전히 내가 한 발짝 앞선 입장이기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경쟁은 생물의 생존을 위해 ‘자연’스러운 것이니까. 다만 생물의 생존에는 생물 간 상호관계를 유지하는 ‘공존’도 필요하고 생태 환경을 다르게 조정하여 경쟁을 ‘완화’하는 것도 필수적인데,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과연 얼마나 배우고 고민하며 달려왔는지는 모르겠다. 하긴, 밤하늘에 떠 있는 달을 한번 쳐다본 적도 없이 뛰었으니.
올림픽에서도 트랙에 따라 출발선의 위치를 조정한 후 목적지를 향해 달리기를 시작하는데, 과연 나의 출발선은 적정했는지, 목적지에 대한 고민은 충분했었는지도 잘 모르겠다. 나보다 앞서 나가는 이들을 보면서는 출발선이 불공정하다고 느꼈고, 나보다 뒤에 오는 이들을 보면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던 나는 참 위선적인 인간이었다. 그리고 아직도 이루지 못한 ‘넓은 집과 양주와 좋은 자동차’라는 목적지는 언젠가부터 저 구름만큼이나 덧없게 느껴졌다.
나의 달리기는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병원행으로 멈췄다.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좋든 싫든 내 마음속에 롤모델로 굳게 자리 잡고 있었던 아버지의 삶이 무너졌었다.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저렇게 살아야 하는지 회의감만 남겨준 채로. 최연소, 승진, 인정…. 이런 것들에 대한 욕구가 사라지니 나는 달리기의 의미를 찾지 못했다. 아버지 당신의 목적지는 어디였는지, 당신의 달리기는 어땠는지, 그리고 지금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물어볼 기회가 한 번만 있었더라면. 그 한 번의 기회가 간절했다.
멈추고 나니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멈춘 후의 삶에 대해 배운 적도, 생각해본 적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먹고 싶은 것도, 가지고 싶은 것도, 가고 싶은 곳도 없다는 나를 보며 사람들은 ‘어린놈이 왜 그러냐’며 핀잔을 주었다.아내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살폈다. 그런데 내가 무기력하게 하루하루를 보내는 동안 내 아이들이 하루하루 자라 조잘대기 시작했다. 문득 나는 어떤 아빠인지, 어떤 아빠가 되고 싶은지를 생각해 보게 되었다. 역시 이것도 어려운 문제였다. 하지만 무기력하던 삶에 새로운 자극이 되어주는 것은 분명했다.
성공이란 무엇일까. 오늘의 삶과 내일의 삶은 어떤 균형 속에서 만족과 희생을 배분해야 할까. 언제나 명쾌하게 보였던 것들이 점점 더 흐려진다는 것은 내가 어른이 되고 있다는 것일까. 차라리 비행기의 창문을 열고 구름을 담아 집에 가져가는 것이 더 쉽겠다고 생각하며, 아이가 말하는 달나라의 옥토끼 두 마리를 찾는 것이 더 재미있겠다고 생각하며 목베개를 끼워 넣었다.
출장 기간 동안 회의는 잘 진행되었다. 준비한 대로 하나씩 풀어냈고 현지의 고객뿐 아니라 김 전무의 만족도 얻었다. 이번에는 목표 발행액을 수월하게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고, 역시 ‘얼굴 보고 마주 앉아서’ 명함을 주고받은 덕분인지 네트워크도 훨씬 단단하게 연결되는 느낌이 들었다.
인천공항에 곧 착륙하겠다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바퀴가 활주로에 닿으며 기체가 흔들거렸다. 비행기 바퀴의 소음이 잦아들자 여기저기에서 휴대폰의 알림음이 울렸다. 다들 무엇이 그렇게 급한지. 어쨌든 내 휴대폰도 빠지지는 않았다. 팀 카톡방에서 박 이사가 최 대리의 후임으로 지원한 사람들의 이력서를 보고 다섯 명을 추려놨다고 했다. 양반은 못되는지 최 대리, 아니 대표가 된 최준우가 내게 따로 보낸 메시지도 있었다.
부장님, 잘 지내시죠? 다름이 아니라…. 괜찮으시면 댁에 20분만 놀러 가도 될까요? 형수님께도 인사드리고, 다윤이와 다준이도 보고 싶어요.
답을 보내려다가 반가운 마음에 전화를 걸었다.
“최 대표. 무슨 일이야? 이제 비행기에서 내리려고 해.”
“아, 출장 다녀오셨어요? 잘 다녀오셨죠?”
“응. 바쁜 사람이 우리 집까지 와준다면 나야 고맙지. 그런데 혹시 무슨 일이 있나 싶어서.”
“네. 별일은 없구요, 부장님과 형수님께 여쭤보고 싶은 것이 있어서요.”
“최 대표 시간 괜찮으면 두 시간쯤 후에 집에서 볼까?”
“네. 뵙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최 대리는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집까지 오려는 것일까. 가방을 찾고 공항철도로 향하는 내내 궁금했다. 그런데 공항철도 입구에서 주섬주섬 카드를 꺼내려던 순간, 아내가 부탁한 아이스와인을 잊었다는 것을 알았다. 이런, 가장 중요한 고객을 만족시키는 일에 대실패 한 것이었다.
이번에는 반성문을 쓰지 않으려고 만반의 준비를 했었는데. 집 근처 와인가게에서 적당한 것으로 사갈까. 솔직한 반성문이 나을까, 아니면 혼나더라도 대체재를 구해서 들어가는 것이 나을까.
아, 이것도 모르겠다.
나는 어른이 맞는 것 같다.
본 소설은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 연재 예정입니다.
직접 찍은 사진을 사용하였습니다.
기다려주시고, 응원해주시고, 찾아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