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의 자연과 정치 (2)
천신만고 끝에 페루의 수도 리마에 도착하였다. 하필 출국 당일 수도권에 폭설이 내렸고, 그 때문에 대한항공 LA행 항공기가 2시간 늦게 이륙하였다. 폭설 상황에서 2시간 지연은 매우 양호한 수준이지만, 환승편이 있는 상황에서는 딱히 그렇지 못하다.
LA에서 리마행 비행기를 당연히 놓치게 된 나는,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3시간 뒤에 있는 산티아고 행 비행기를 타고 산티아고로 들어가, 그곳에서 다시 리마로 돌아가게 되었다. 비행 시간만 8시간이 늘어났고, 리마 도착 시간은 12시간이 늦어졌다.
러시아 여행 때 겪은 동방항공 취소 사태 이후로 멀쩡히 환승을 한 적이 없는 것 같다. 국적기를 이용하는 이번만큼은 다를 것이라 믿었지만, 자연 재해 앞에서는 국적기고, 동방항공이고 매한가지로 답이 없다.
아무리 장거리 비행에 익숙해졌다고는 하지만, 예정에 없던 8시간이 추가된 30시간 비행은 확실히 괴롭다. 폭설이라는 불운 앞에서 잠시 자기혐오에 빠진다. ‘내 인생은 왜 이럴까?’ 사실 좋은 팔자이다. 6개월에 한번 씩 가고 싶은 지역에 여행을 가고 있다.
부모님은 건강하시고, 좋던 싫던 직장 생활을 하고 있다. 내가 번 돈으로 공연, 투어 얼마든지 보고 즐길 수 있는 형편이다. 남들은 평생 못 가보거나, 은퇴해서 겨우 가는 남미도 직장 생활 중 가는 호사를 누리고 있다.
이 정도 불운은 얼마든 있을 수 있는 일인데, 최근 일련의 시련 속에서 잠시 자존감이 낮아졌나보다. 대기 시간이 늘어난 탓에, 어학공부도 좀 더 하고 책도 볼 수 있었지만, 그런 걸로 excuse가 되질 않는다.
불운을 대하는 부정적인 태도를 인지하자, 2차 자기혐오로 이어진다. ‘나는 왜 이렇게 밖에 불운에 대응하지 못할까, 某연예인은 럭키비키라는 신조어까지 만들며 초긍정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다던데.’ 이런 악순환은 빠르게 끊어내야 한다.
리마에 도착하자마자 기분이 빠르게 풀린다. 생애 처음으로 남반구에 들어선 것이다. 따뜻한 날씨의 리마에서, 푸근한 인상의 인디오 택시 기사와 잡담을 나누며 숙소로 이동한다.
공항에서 숙소로 이동하는 길에 보이는 리마의 모습은 전형적인 후진국형 도시의 그것이다. 구도심의 콜로니얼 양식도, 신도시의 세련된 모습도 찾을 수 없다. 낮은 층높이의, 무색무취 시멘트 건축물들로 이루어진 모습에서 계획 없이 확장된 남미 도시의 전형을 느낀다. 그럼에도 이것도 나름 매력이 있다.
도심을 벗어나 해안가 도로에 진입한다. 태평양의 서쪽을 바라보는 것은 LA이후에 10년만이던가. 호젓한 감상에 젖어든다.
리마에는 이틀 머물고, 쿠스코와 마추픽추로 이동한다고 하니, 택시기사님은 한 번도 그곳에 안 가봤단다. 왜 안 가봤냐고 물어보니, ‘Mui Alto(너무 높아서)’라는 말을 반복한다. 태어난 곳을 한 번도 떠나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다.
리마에서는 신시가지에 위치한 한인민박에서 머무른다. 원래 이곳에서 3일을 머물 예정이었으나 하루가 줄었다. 한인 민박 사장님은 언니 부부를 따라서 12년 전 페루에 자리를 잡았다고 하는데, 청결한 숙소와, 정갈하고 넉넉한 식사가 사장님의 인품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 하다. 샤워만 하고 길을 나서니, 쉬지도 않고 나가냐며 놀란다. 연차를 내고 온 피 같은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