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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블랭크 Apr 20. 2022

집 밖에서 즐기는 와식 생활, 누와

스테이 누와

지도 어플리케이션을 사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촌에서 길을 헤맨 경험이 다들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 서촌은 신도시처럼 정형화된 토지 구획이 아닌 자생적인 건설행위에 의한 터무늬가 오랫동안 누적된 지역이다. 그렇게 생겨난 제각기 다른 크기의 건물을 골목으로 촘촘히 엮다 보니, 서촌에 거주하지 않는 외지인이 능숙하게 길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스마트폰을 주머니 안에 집어 놓고 동네를 산책하듯이 걸으며 우연히 목적지가 나타나기를 바라는 편이 낫다. 한옥 스테이 ‘누와’를 마주하는 순간도 여느 서촌의 장소를 찾아가는 일과 다르지 않다. 정처 없이 돌아다니다가 성인 한 명이 지나갈 수 있는 너비의 골목으로 들어가고, 징검다리처럼 바닥에 놓인 돌을 하나하나 밟으면 나무로 만들어진 대문이 나타난다.



열 평 남짓한 스테이, 실내 면적으로만 계산하면 일곱 평 정도 되는 이 소담한 한옥은 와유를 기반으로 한 다섯 가지 테마를 포함하고 있다. 바쁜 일상생활에서 누리지 못한 풍류를 즐길 수 있도록 산수, 다도, 독서, 숙면, 목욕을 위한 공간을 마련한 것이다. 숙소 대문 너머의 작은 정원에서 단풍나무를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한옥 안으로 몸을 옮겨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실 수도 있고, 오래된 나무 책꽂이에서 얇은 책 하나를 꺼낸 다음 포근한 이불 속으로 들어가 책을 읽다 곤히 잠드는 것도 좋다. 누와가 제안하는 와유는 글자 그대로 바닥에 기반한 공간 연출을 보여준다. 이렇게 스테이에서의 분명한 행위를 유도하는 디자인은 사용자가 주어진 면적에 비해 다채로운 경험을 하고 있음을 체감하게 만든다. 


사용자가 제안받은 와유의 경험 중에서도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목욕이다. 물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로 인해 숙소 안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어나, 누와 말고도 최근 지어지는 스테이에서는 욕조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예전과는 다른 점을 찾자면 욕조의 위치를 화장실 겸 욕실의 한 켠이 아닌 물 속으로 들어가 생각에 잠기고 경치를 구경할 수 있는 자리로 정한다는 것이다. 모든 스테이의 욕조가 따뜻한 물을 가득 담아 투숙객의 피로와 긴장을 풀어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와의 목욕 경험이 인상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촉각의 차이일 것이다. 전면 유리창을 개방하면 욕조 사용 시 애로사항으로 지적되는 환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데, 덕분에 바깥으로 공간이 열리면서 사용자가 실내이지만 실외에 있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목욕을 마치면 익숙한 화강암 타일이 아닌 마이크로 토핑으로 마감된 바닥을 밟으며 온돌의 따스함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이쯤 되니 서촌 골목을 굽이굽이 돌아 일상과 독립된 숙소를 경험하게 만든 사람들이 궁금해진다. 누와를 디자인한 건축가는 노경록, 박중현, 이상묵이다. 이들은 건축사사무소 지랩을 함께 설립하고 기획, 브랜딩, 공간 설계를 통합적으로 고민하며 다양한 유형의 스테이를 선보이고 있다. 그들은 국내 숙박업계에 큰 변화가 찾아온 2013년에 숙박시설 설계의 영역으로 뛰어들었다. 이 시기에는 서울 도심의 여러 호텔 체인이 수영장 이용권과 객실 숙박권을 엮은 상품을 경쟁적으로 내놓으면서 집으로부터 멀지 않은 숙소에 머무르며 휴식을 취하는 스테이케이션(Staycation)의 개념이 보편화되기 시작했다. 새로운 여가생활 패턴의 등장으로 좋은 프로그램과 공간을 갖춘 숙소를 한눈에 보고 싶은 소비자의 요구가 늘어나자, 지랩은 숙소 큐레이션 플랫폼 ‘스테이폴리오(Stayfolio)’를 2015년에 론칭했다. 건축가의 활동 범위를 좋은 공간을 설계하는 것에서 건축을 소개하고 유통하는 영역까지 확장한 셈이다. 



그래서인지 지랩이 선별하는 스테이는 다른 숙소 예약 플랫폼을 통해 접할 수 있는 곳과 결이 다르다. 스테이폴리오는 스테이의 오리지널리티, 공간의 디자인, 운영하는 사람의 마음가짐, 합리적인 가격대라는 기준을 가지고 스테이를 선정한다. 번거롭지만 스테이를 운영하는 호스트와의 소통 과정을 자주 가지면서 공간 운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고 한다. 스테이에서의 공간 경험과 서비스의 퀄리티를 유지하기 위한 그들의 큐레이션 방법인 것이다. 이렇게 숙박에 관한 높은 감도를 지닌 지랩은 보다 더 큰 규모의 서비스인 ‘수평적 호텔’을 구상하고 있다. 물리적으로 한 지붕 아래 여러 시설이 있는 고층 호텔이 아닌 여러 시설이 마을 곳곳에 분산되어 있는 스테이를 만드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는 커뮤니티, 즉 동네의 매력적인 공간을 연결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현재 지랩은 ‘서촌유희’라는 이름으로 그 실험을 진행 중이다. 매달 하나의 책을 깊이 있게 소개하는 책방 ‘한권의 서점’, 여러 분야의 창작자가 모이는 배움 공간 ‘서촌창작소’, 친환경 제품을 모아 놓은 편집 매장 ‘서촌도감’ 등이 대표적이다.


출처 | 서촌유희 홈페이지(http://yoohee.kr/)


누와를 매개로 삼은 동네 향유 서비스 서촌유희는 숙박 경험의 확대과 지역 재생의 새로운 대안, 그 이상의 현상 변화를 의미하기도 한다. 바로 성수기와 비수기의 경계가 옅어지는 것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로 인해 원격 업무와 여행의 중간에 해당하는 근무 형태인 워케이션(Workation)이 도입되면서, 최근 주 4일 근무제도 정착을 통한 ‘확장된 주말’이 필요하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보다 높은 업무 효율을 얻으려면 휴식과 영감을 위한 재충전 시간을 마련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스테이는 단순한 숙박의 선택지가 늘어나는 현상이 아닌 주거, 업무, 여가 방식이 통합적으로 변화하는 현상 가운데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 글. 김예람 에디터 /공간 사진. the blank_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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