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봄비가을바람 Aug 18. 2024

라벤더 향기 30

시간을 맡겨 놓은 방

 "재훈이 퇴원해서 집에 잘 왔다. 정말 고맙다. 여울아."

2주 후, 오빠한테서 전화가 왔다.

한껏 부드러운 목소리와 저자세로 마치 딴 사람처럼 조용히 말했다.

늘 쇳소리가 나는 목소리로 여울의 심장에 바늘 꽂는 말만 하던 오빠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

 "너 시간 괜찮으면 주말에 같이 밥 먹을까?"

여울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한숨이 올라왔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그냥 예전처럼 해요."

잠시, 수화기 건너편에서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새삼스럽게 그런 필요 없어요. 이제 아빠도 안 계신데 연결고리가 없잖아요. 나도 더 이상 도움이 되지 않을 거예요. 내가 가진 건 전부 다 가져갔잖아요."

 "여울아. 그게 아니라 우리가 너무 미안하고 염치가 없어서.."

 "그러니 이럴 필요 없다고요.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보고 살지 않아요. 안 보고도 살아요. 우리도 그냥 그렇게 살아요. 미안하면 미안한 대로 살아요. 앞으로 미안한 일 만들지 않으면 돼요."

 "엄마가 너, 김치 가져가라고.."

<김치,  그놈의 김치.>

 "김치 떨어지면 내가 갈게요."

 "그래. 알았다."

힘 없이 전화를 끊는 오빠의 목소리가 예전과는 다르게 들렸지만 여울은 그 집에 다시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혹시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웃을 수 있다고 해도 여울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안 보고 사는 가족들도 많다.



 "여울아. 예쁘지?"

 "그래. 예쁘네."

소영의 딸이 백일이 되었다.

눈도 맞추고 웃는 듯 보는 것이 참 예쁘다.

 "너도 이런 아기 엄마 되고 싶지 않아?"

 "엄마 하고 싶지."

 "그럼. 하면 되지."

소영의 눈이 반짝였다.

뭔가를 꾸미고 있을 때의 눈빛이다.

 "왜? 뭐! 너 뭐 생각하는데?"

 "아니야. 그냥 너도 엄마가 되면 좋겠다는 거지."

그러고는 은근슬쩍 성준에게 눈짓을 보냈다.

 "잠깐만. 배달이 좀 늦네."

성준이 휴대폰을 들고 주방으로 가자 소영도 뭔지 모르겠지만 긴장한 것처럼 보였다.

 "뭐야? 뭔데?"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야."



 여울의 짐작대로 부부가 뭔가를 꾸미고 있었다.

 "시간이 났네. 주현 오빠, 어서 들어오세요."

30분쯤 후, 손님이 큰 쇼핑백을 들고 들어왔다.

 "뭐 이런 걸 다."

마음에도 없는 말들이 오고 가고 세 사람을 곱지 않은 눈으로 보고 있는 여울에게 어색하게 다가왔다.

 "저기, 주현 오빠야. 성준 오빠 친구."

 "아, 네."

여울은 소영에게 눈을 흘기고 주현에게 인사했다.

 "이주현입니다. 김주현 아닙니다. 아, 왜?"

성준이 팔꿈치로 주현의 옆구리를 쳤다.




<대문 사진 포함 출처/Pixabay lite>




 배달 음식도 도착하자 식탁에 음식을 차렸다.

소영도 아기를 재워놓고 여울의 옆에 앉았다.

공교롭게도 남녀가 서로 마주 앉으며 여울은 이주현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가만히 보니 왠지 익숙한 얼굴이었다.

 <이 사람, 어디서 봤지?>

 "우리 어디서 만난 적 있지 않나요?"

이주현이 먼저 여울에게 말을 걸었다.

 "어디서 봤는데요?"

 "시간을 맡겨 놓은 방에서.."

실없는 말이라고 생각한 여울은 새침하게 물었다.

"저한테 관심 있으세요?"

 "관심이라기보다 워낙 제 집처럼 성에 들락날락해서 옆에서 좀 지켜볼 필요가 있다랄까, "

 "뭐, 뭐라고요?"

여울은 이주현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그런 여울을 피하지 않고 이주현도 마주 보았다.





끝..





이전 29화 라벤더 향기 29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