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좋아해 줘서 고마워

2.

by 그릉


나의 단짝이었던 화투패가 없이 수업을 들은 소감은?

지루하다. 오늘의 스포츠뉴스를 기다리며 시답지 않은 정치 이야기가 난무하는 9시 뉴스를 보는 것만큼. 그리고 매주 수요일마다 찾아오는 근현대사 시간은 정말이지 옆에 있는 창문으로 뛰어내리고 싶은 심정이다.

나의 학업 성적은 수학을 빼고는 머리가 빠질 정도로 정말 엉망이다. 언어 지문을 읽고 있자니 두줄만 읽어도 뒤에 읽었던 말이 무슨 말인지 기억이 안 나고, 당연하게도 영어 지문은 읽히겠는가. 이 정도만 말해도 다른 과목은 얼마나 처참한지 짐작이 갈 것이다.

우리 학년은 14개 반이 있고 500명이 조금 넘게 있는데, 나는 항상 숫자 4 안에 갇혀 살았다. 400명이 아니고 500명이라 얼마나 다행인지. 앞자리가 5가 아닌 것에 심적으로 안정을 얻고 주눅 들지 않고 학교를 다녔다. 하지만 나는 이것들을 몰라도 살아가는데 전혀 문제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이것들 없이 나는 성공할 것이라 확신에 차있었다. 지금 돌아보면 저 남학생은 무슨 생각으로 자랑스럽게 저렇게 말하고 다녔을까.

하지만 지금 보면 결국 남학생의 말이 전부 맞더라.


그래서 아까 그 질문으로 돌아가서, 화투패가 없이 수업을 들은 소감은? 아니 그 여학생 옆에서 수업을 들은 소감은?

고통스럽다. 난처하고 곤란하고 매우 불편하다.




"을사조약이 가지는 가장 중요한 의미를 말해볼래?" 오늘도 어김없이 근현대 수업에 마주 앉아있다.

왼손으로 턱을 괴고 기이한 피로감에 빠져 고갤 돌려 운동장에서 이리저리 놀아나는 축구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커다란 축구 골대 앞에는 누가 봐도 공부만 할 것 같은 아이가 어정쩡하게 서서 지키고 있다. 그리고 그 조금 앞에는 분당고등학교 체육복을 입은 드로그바가 미친 듯이 뛰어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치 다리를 다쳐 뛰지 못해 쓰러져있는 가젤에게 일주일 동안 굶은 사자가 뛰어오는 것 같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안쓰러운 가젤은 형태도 없이 사자에게 잡아 먹혔지.

"거 봐 공부할 줄 몰라도 된다고.." 나는 작게 속삭였다.


"을사조약이 가지는 가장 중요한 의미를 말해볼래?" 똑같은 질문이 반복되는 것을 이제 알아차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선생님의 시선은 나를 향해 있었고, 여학생의 시선도 나를 향해 있다는 것을 느꼈다. 이런 상황은 익숙하다. 수업시간의 말썽쟁이에겐 이 상황은 1000번의 전투를 한 장군의 고작 1001번째 전투일 뿐이었다. 하지만 칼과 화살로만 싸우던 백전노장의 장군은 마치 처음 장총으로 무장한 군대와 마주한 것처럼 몸이 얼어붙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타앙" 경쾌하고 산뜻한 소리가 귓가를 울린다.

여학생은 밝다 못해 빛나는 눈망울로 시선도 피하지 않고 나를 쳐다본다.

나는 가슴에 무언가 뜨거운 것이 꿰뚫은 것처럼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천천히 몸에 힘이 빠지고 목덜미에서부터 등을 따라 내려가는 땀 한 방울이 느껴질 만큼 감각이 예민해졌다.

다시 주위 소리가 들리고 선생님의 물음이 내 귀에 들렸을 때, 그제야 그 아이의 눈망울을 피할 수 있었다.

"죄송합니다." 무기력하게 입을 열었다.

나는 작게 말을 하고 나서야 다시 수업은 시작되었다.


'죄송합니다'라니 이렇게 쉽게 상대에게 항복했던 적이 있었던 말인가!

그날 그 아이의 빛나는 눈망울은 말썽쟁이를 무기력하게 죽였다.



이 눈망울은 그 아이와 나와의 관계 같았다.

여러 해 뒤, 내가 어떤 노력을 기울여도 끝내 이 눈망울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를.

여전히 과거에만 머물며 작게 빛나고만 있는 우리 둘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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